나의 원철군에게

기억이 끊기기 조금 전이라네. 아무래도 간만에 취할 수 있을 듯 싶어서 이렇게 기록하는 중이야. 책을 읽는다는 핑계로 밤을 새고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고 나니 이제는 정말 취할 듯 싶어. 이성이 끊기기 조금 전이라네.

몇년 만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행복한 기분으로 지금 이성이 끊기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만약에 오늘도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처리한다면 무척 화가 나고 말 것 같아. 가끔은 요즘 나에게 일탈성이 아예 거세되어 버린 듯 느끼고 있거든.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요즘에는 알게 되었어. 일탈이나 잠시 미쳐보는 것도 오직 어린 시절에만 허락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

지금 난 잠시 이성을 접고 싶어. 그리고 겨우 기회가 찾아 온 듯 싶다네. 약해진 건강과 정신으로 천연덕스럽게 정상인척 행동하기에는 문제가 따르는 듯 싶다네. 자네는 내 기분을 알아 주겠지. 자네마저 모른다면 난 정말 괴로워 할 것 같아. 지금처럼 잠시 괴로워 하는 것 말고
정말 괴로워 할 것 같아.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 그냥 이해해 주게나. 삶은 정말 재미있는 것 같아. 모른척 외면했던 많은 기억들이 이제는 나를 압박하고 있다네.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아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

자네 내 이성이 끊기는 일이 얼마나 빈한한지 알고 있겠지. 몇년에 겨우 한번 있는 그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지금 난 최선을 다해서 나의 기분을 기록하고 있다네. 만약 오늘 기록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몇년 동안 없을 지도 몰라. 나에게 이성이란 항상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전략적인 필요성이 없는 이상 편한 기분으로 취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니 내 두서없는 글을 읽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말게나. 이것이 취하기전. 이성이 끊기기 일보전 나의 모습이네. 취하기 잠시 전에는 항상 다른 문제에는 무척이나 둔감해 진다네. 오직 나에게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지. 내가 가진 모든 집중력이 나에게 모여져 나의 작은 신경 하나의 변화까지 모두 기록하고 있다네. 물론 취하고 난 다음에는 모두 잃어 버리고 말겠지만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어. 너무 오랜만에 취할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것을. 왜 그렇게 취하고 싶었는지. 난 정말 바보인가 보네. 아마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취기에서 깨어날지도 모르겠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아마 지금의 행각을 까맣게 모른채 다시 정상을 가장할지도 몰라. 하지만 자네는 알아게 주게나. 내가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약한 정신을 가진 자라는것을.

자네 그것 아는가? 한 주전 내가 어느 여인으로 부터 이상한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 그녀는 나에게 애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네. 내 공식적인 태도를 보고 나서는 내가 항상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하지만 자네가 아는 나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잖나. 경우에 따라 다양한 행동을 하는 것이야 말로. 나에게 적합한 행동 양식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취하기 직전 아주 행복해 하고 있다네. 비록 어제 그 제안을 아멸차게 거절하긴 했지만 말이야…

Modified 2005.4.13
이 편지는 2003년 5월의 어느 저녁에 쓰여진 것이다. 좀처럼 취하는 경우가 없지만 이 때만큼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보고 싶었다. 뭐랄까? 세상의 고통은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기분.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나서 한시간쯤 지났을 때 난 멀쩡하게 술기운을 털어냈고, JS군을 택시에 태워보냈으며, SJ군이 버스를 타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안암동을 지나고 돈암동을 지나 삼선교에 이르러 홀로 즐겨가던 허름한 술집에 들어 갔다. 고량주에 오향장육을 시켜놓고 가상의 인물과 주거니 받거니를 시작했는데 마실 수록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술로 시름을 잊는다는 시구가 거짓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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