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막을 내리며

2001년 2월의 어느날 밤에 눈이 내렸다. 한여름도 아닌 2월에 내리는 눈이 지닌 특별함을 말하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또렷하게 기억될만큼 아름다운 풍광과 멋진 대사가 어울러진 밤이었다면 펜을 드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진실은 아니다. 내 삶의 한 막이 내려가는 오늘. 지난 막이 내려가던 어느 겨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기에 펜을 들었다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바닥에 쌓이지는 않지만 하늘을 점령해 버린 눈발. 하지만 한없이 포근하고 따스하게 나를 감싸는 눈송이. 바람은 눈꽃으로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고, 한 겨울 동안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버린 대화가 있었다.

시종일관 명랑했던 대화 속에 숨겨진 의미와 이중성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하나의 막을 마무리 지음에도 불구하고 공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겨우내 익숙해진 모든 것들로부터 버림받고 새로운 무대에 뎐져지게 됐지만 새로운 무대가 못내 기다리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날 밤새 잠들지 못했던 것도 기억난다. 붉은 나트륨등 아래 소리없이 적멸하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추억에 봉헌하기 위한 촛불을 밤새 켜놓았던 것도. 촛불을 등불삼아 밤새 써내려갔던 편지들과 이야기. 그리고 한숨들. 하지만 그날의 담담함과 당당함을 오늘의 내게서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 날 내가 계획한 것들 가운데 이룬 것은 무엇이고, 그 날 내가 포기한 것들을 충족시킬만큼 얻은 것이 있는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마무리다.

사실 난 하루종일 그 날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버금가는 마무리를 원했던 모양인데 지금 내 몸에 남은 것은 공허감과 패배감뿐이다. 아무리 제어해보려고 노력해도 아무리 속여보아도 혼돈에 녹아버린 마음의 형체를 찾기란 요원해 보인다.

새로운 막에는 무엇을 하게 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후회를 할까? 어쩌면 지난 막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배우들이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옛날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기대란 평생 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겠지? 앞으로 평생 동안 오늘 같은 흥분과 기대감이 당신을 위해 쓰여지는 날은 없을거란 그녀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새로운 막에는 비워졌던 나를 채워야겠다. 바닥난 체력과 인내심도 다시 채워넣고, 바닥을 드러낸 인용문과 상식, 그리고 새로운 취미도 채워넣어야 겠다. 무엇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겠지. 망각의 강에 던져버린 기억과 추억을 찾아 헤매지 않도록 지금껏 누린 삶보다 배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리라.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리라. 스스로에게 배풀었던 이상한 적의와 시샘. 이제는 기억에서 지우리라 마음먹는 하루다.

오늘의 난 잠시 걸음을 멈춘 과객이다. 내일이 되면, 모레가 되면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겠지. 그 걸음이 향할 곳 아직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그 길을 사랑해야겠지? 그것이 내가 지난 막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니까?

Jecta est alea!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