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쁘게 만들어줘. 생각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편지 한통을 받았다.

짧은 삶을 살면서 인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많은 편지를 받아왔지만 이 편지만큼은 너무나 미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마음이 가벼워졌고 다시 읽었을 때에는 되려 마음이 무거워졌으며 30분 후에는 슬펐고, 지금은 기쁘다.

데미안을 다시 읽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많은 문장을 읽고 많은 글들을 접해왔지만 이렇게 다양한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연한 한숨만큼은 나도 자제 할 수가 없다. 아니 ‘내 마음 나도 몰라 갈 곳 몰라 하노라’란 시구만 생각이 난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마음이란 인류 공통의 적에게 있으니까.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시키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내려와서 가장 좋은 점은 하룻밤이더라도 내 이야기를 아무런 불평없이 들어줄 가족과 친구가 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매순간마다 언제 인격이 붕괴될지 모르는 금단 증상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그 친구는 나의 삶을 조용히 지켜봐준 지기였는데 그에 따르면 지금의 번뇌하는 내가 진실에 가까운 모습이라 한다.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킬 때의 나는 그가 아는 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라 했다. 우울하고 힘들어 하면서도 조금 구질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이 휠씬 나답다고 했다.

모르겠다.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어.
무엇을 해야할지.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번잡함에 나를 맡기는 것인데. 어렵기만 하다. 언제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게 될까? 지난번에는 5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번에는 또 얼마나 필요할까?

친구의 말대로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견뎌내야겠다. 여기저기 치졸하게 감정을 흘리고 다니면서 짐짓 미친척하는 것보다는 조금 우울하게, 조금 고독하게, 조금 냉정하게. 그렇게…

모네의 초상, 파이프를 입에 물고 신문을 읽고 있는 이 남자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렇게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이 남자의 일생을 알기에 그런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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