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다. 잃어 버리다.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내가 발견한 감정은 무엇일까? 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걸어다닐 수 있다 믿었던 내 집이 못견디게 낯설었다. 몽롱한 의식으로 이유를 추적하다 만난 결론은 기억이 송두리채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또렷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던 기억이 하룻밤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지금 나에게 남은 기억이라고는 스틸컷처럼 아주 짧은 단편뿐이다. 아주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믿었던 추억과 순간들까지 지난 밤에 모두 잃어버렸다.

허무하다거나 공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정확하게 남은 기억이 있어야 그런 기분이 생기는 법인데. 지금의 나에게는 이런 기분을 만들어 낼만한 재료조차 없다.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의 맨마지막장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과거를 되새김질해봐도 편지의 주인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던 것처럼 나역시 그렇다. 왠지 슬퍼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으니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머리속에 남은 기억은 흐릿한 흑백 사진들 뿐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는 사진 몇 장만이 내가 나이 먹었음을 증명해줄 따름이다.

대체 무슨 사단이라고 난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어 기제를 작동시켰고, 밤새 편두통에 시달리며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무언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루 밤사이에 기억을 관통해 흐르던 터널이 폐쇄되었다. 어제의 나는 과거에 대하여 즐겁게 말할 수 있는 수많은 추억들은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넌 어떤 사람이야? 어떻게 살아왔어?’ 이런 질문에 피곤에 몸이 지칠 때까지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내 과거는 3분 거리도 안된다. 내가 알던 수많은 사람들, 추억들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되찾지 못한다면 아쉽기는 하지만 시간에 그냥 띄워보내야만 하는 것이 순리겠지.

무엇인지 모르겠다. 스타벅스에서 받은 메모용 노트의 표지 뒷장을 보면서, 까페 베로나를 마시면서, 텔레비젼에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면서 무언가 익숙하다는 느낌은 드는데 왜 익숙한지는 알 수가 없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