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혹은 덧붙임말

홍차에 브랜디를 넣었다. 원래는 몇방울만 떨어뜨려 향만 살짝 내야하는데 한눈을 팔다 보니 제법 많은 양을 넣어버렸다네. 결국 살구향과 뒤섞인 브랜디가 날아가 버릴 때까지 기다려야만 제대로 맛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과유불급이라는 말 이래서 나오는 것이겠지?

추신을 덧붙이는 이유는 혼자서 블로그를 감상하다가 사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서야. 다른 그림들이야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니까 설명이 오히려 부족한 나를 드러내는 함정이 되겠지만 사진의 경우에 있어서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더군.

사진의 주인공은 바르지니 리도엔이라는 프랑스 여배우야. 1976년 생이니까. 우리와 몇살 차이나지 않는군. 지금껏 우리가 매혹당했던 배우들이 우리보다 반세대 연상의 미인들이었다면 이 배우는 우리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아. 막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이고 나 역시 점찍어 놓았었는데 대니 보일의 비치에 나온 것을 보고 나의 감상 리스트에서 제외시켰지.

뭐랄까? 비치라는 소설을 영화보다 먼저 읽은 나로서는 아니 디카프리오라는 이름에 가려져 버린 대니 보일의 파격미와 리도엔의 단아함, 그리고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진 소설의 플롯을 기억하는 나에게 비치라는 영화는 볼썽사나운 졸작이었거든. 아무튼 그런 편견이 오랬동안 남아 있었다네.

지난해 추석 무렵으로 기억하네. 연휴에 집에 내려온 내가 새벽 일찍 일어나 텔레비젼을 켰을 때 나오던 케이블 tv의 영화가 바로 Jeanne et le garcon formidable이었네. 영화의 반은 뮤지컬이었는데 시간이 4년이나 흐른만큼 조금은 낡아버린 색감이었지만 아무튼 꽤나 인상깊은 내용이었어. 가벼운 에피소드에 섞인 욕망과 어긋남을 나역시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네.

아무튼 아래 사진에 리도엔에 앉아 있는 길은 망자들을 위한 묘지의 포석이라네. 뒤로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양 옆에 존재하는 것이 무덤이고. 상복을 입은 채 길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리도엔과 아득하게 보이는 길의 끝.

영화를 모두 보고 난 다음 가장 머리속에 남는 스틸컷이었다네. 검정 상복의 왼편 가슴에 달린 꽃 한송이와 화장기 없는 얼굴이 보여주는 느낌은 공허하면서도 슬프지만은 않은 이상한 기분을 선사하지. 아무튼 그렇다네.

그리고 어려운 말과 이해불가능한 말로 채워넣은 더 초이스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런 변명이 되어 버린다네. 그런 게임들이 있잖나. 자원의 편재성만 존재하고 그 편재된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구사하거나 아님 자원을 점령함으로써 승부를 가르는 게임들.

난 그런 게임이 무척이나 싫다네. 뭐랄까? 자원의 편재성과 유한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단지 그것이 끝이 아니잖나. 실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지혜로운 동물이라서 한계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게임의 경우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승패야.

이기고 지는 것. 둘 다 이길 수 있는 길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 게임의 규칙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네. 둘 다 이길 수 있다면 승점은 6이 되지만 승패를 반드시 내야하는한 최대 승점은 오직 3점 뿐이야.

난 그런 편협함이 싫은 거라네. 그리고 그런 편혐함의 대가로 얻은 비열한 승리감과 비굴한 패배감 모두 싫다는 것이지. 그리고 시간이지나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은 오판에 대한 가혹한 응징뿐이겠지.

모험을 하지 않은 세상은 참으로 재미없는 세상이 되어버린다네.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닫힌 세계와 카오스적 혼란이 존재하는 열린 세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보람되고 재미날까? 자네는 어떤 세계를 자식에게 주고 싶은가? 우리가 견뎌야만 하는 상황에 따라 최선의 행동을 해야하는 세계인가 아니면 모험을 권할 수 있는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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