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초입에서

간만에 향이나 맛 모두 일품인 홍차가 만들어졌다네. 입안 가득히 퍼지는 살구향이 비강으로 올라온다네. 향이 좋은 술을 즐기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아주 가끔이지만 인퓨저에 물을 내리는 속도에 따라 아주 다양한 맛이 나타난다네. 수온과 찻잎의 양, 그리고 인퓨저를 통과하는 속도가 변수인데 오늘은 우연에 좌우되는 변수가 너무나 훌륭하게 맞춰진 듯 싶다네. 지난 여름 내내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군.

참한 처자하나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던가? 우리 나이가 나이인 까닭으로 조금 어렵구먼. 작년 3/4분기에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많은 것들은 버린 것 자네도 알고 있잖나. 게다가 이번에 전화 번호를 바꿀 때 알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메일과 메일 계정까지 전부 잃어버린 까닭으로 어떤 접촉점도 없다네. 그렇다고 이 좁은 동네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추근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의 점잔을 위해서라면 자네가 참아줘야 할 듯 싶다네.

며칠 전 사진 하나를 보았다네. 자네도 알고 있을 이의 뒷모습이었는데 그 뒷모습을 보고있자니 까닭모를 착찹함에 사로잡혔네. 이유도 까닭도 모르지만 아무튼 가슴이 무거워졌다네. 가벼움에 들떠보려던 마음이 다시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네. 모든 것이 흐릿하지만 단 하나 흐릿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내 마음같다네. 서푼짜리도 되지 않을 이 마음때문에 난 여전히 은자의 삶을 고집하고 있어. 모든 이를 속일지라도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는 인간성의 실제가 더없이 미워지는 참이야.

비가 오고 있네. 홍차는 두 잔째이고 이번 것은 아까만큼이나 제대로 된 작품은 아니군. 오늘부터는 예고했던 대로 서예 교습을 받기로 했네. 나에게 허락된 2년이라는 자유 시간동안 내 삶을 조금 풍족하게 만들어 볼 참이거든. 2년쯤이면 간단하게나마 내 이름 석자는 정도는 제대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이름 석자를 제대로 쓰지는 못하더라도 집에 있는 서예첩을 감상할 수 있을 수준은 되지 않을까?

내일은 서울에 다녀올까 한다네. 휴학도 해야하고 신문사에 있는 짐도 정리하고 덕수궁 현대미술관에도 들리고 무엇보다도 신간을 사냥하기 위해 서점에도 다녀와야겠네. 저녁까지 돌아오려면 힘들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학교에 잠시만 머문다면 그리 어려운 일만도 아니겠지? 간만에 복잡한 대도시에서의 하루를 경험하겠군.

하늘은 벌써 가을이네. 다음주면 벌써 추석이니 올해에는 유난히 겨울이 겨울이 길 것만 같아. 이제 슬슬 긴팔을 입어야 할 듯 싶다네.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와 파란색 스포츠 코트를 어서 입고 싶어. 그 옷을 입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늑해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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