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혼잣말

하루에도 나를 지나치는 말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이면 나를 놀라게 만드는 말들이 있곤한다. 꿈에서 나타나 이른 아침 등허리를 싸하게 만드는 그런 말들. 일상의 시작과 함께 의식 속에서 사라지지만 어느날 흔적없이 나타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말들. 그런 말들이 심심치 않게 존재하는 것이 인생이다.

꿈을 꾸었다. 과거 속의 한 장면으로 걸어들어간 나에게 버스 속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내가 보인다. 처음에는 어떤 의미를 가진 장면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버스는 약수를 지나 한남 대교를 향해 가고 있다. 과거의 나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불가능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난 그 표정에 ‘기이한 행복감’이란 꼬리표를 붙인다. 통화는 2분 34초 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과거의 나의 표정을 바라보는 오늘의 나에게 2분 34초는 2시간 34분보다 긴 시간이다.

무엇이 과거의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어려운 행복감이다. 비록 지금의 삶 역시 행복하긴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지는 않는다. 기쁜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난데없이 선물을 받는 듯한 저 표정은 무엇때문일까?

꿈은 여기에서 끝난다. 많은 의문을 남긴 채로 잠시 과거의 공간으로 나를 살짝 밀어넣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난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다. 꿈 속에서 보았던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언제인지를. 커피를 마시자던 말 한마디에 저렇게 기뻐하던 것로구나. 귓가에 한 음성이 들려온다. 나를 저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던 힘. 그러나 지금의 내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힘.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그런 힘의 존재를 몰랐다면, 어둠에 묻혀 기억이 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잠들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잠이 오지 않는다. 스스로를 모르겠다. 아니 마음의 작은 쓰임새까지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기에 괴롭다. 괴로움보다는 한없이 아쉽다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이를 어쩌해야할지.

요즘의 나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편지를 아예 쓰지않는 것이 아니라 답장만 쓰는 것이지만 먼저 편지를 쓰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편지란 것이 받는 쪽에게는 부담스러운 물건인지 몰랐더냐는 질타 때문이다. 부담스러운 편지를 이유없이 보내는 것이야말로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가학적 도착이 아니냐는 말에 난 편지를 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편지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 주에도 몇통씩 썼다가 결국은 보내지 못하고 지우곤한다. 부담스런 물건을 선물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구차하고 초라하게 만들기에 부담스런 편지같은 것은 쓰지 않기로 했다. 아니 조금더 엄밀한 진실은 하루 하루 메일을 확인했을 때 스팸이나 업무용 메일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환영받으리라 믿었던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만….

원철군의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들과 내 도큐멘트 폴더에 숨겨진 글들을 모두 꺼내 읽어 보았다. 책으로 묶어도 될 정도로 제법 많은 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인이 박힌 글들이라 읽은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다시 떠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곳에서 보고싶다란 그녀의 말을 발견했다. 빈말이어도 좋으니 단 한번만이라도 듣기를 그렇게 원했던 말. 하지만 결국 나에게는 한번도 주지않았던 그 말, 만약 그 말을 얻게 된다면 답례로 피를 건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말. 그 말을 보는 순간 결국 눈물이 맺혔다. 철들고 처음으로 맺힌 눈물이리라. 조금은 서러웠다.

서럽다라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럽다라는 느낌. 그 얼마나 구차한 느낌인가? 왜 이런 느낌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나아가고 물러날 때 덧없이 명쾌하고, 손에 잡을 때와 놓을 때 망설임이 없어야 하며, 행동에 변명을 하기보다는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꿋꿋해야하는 것이 멋진 삶인데. 왜 서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나로서는 어떤 해법도 찾을 수가 없다. 안개 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난 그저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따름이다. 여전히 난 그녀의 번호를 지정번호 할인에 넣어놓고 있으며,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고, 하우스 오브 데드나 타임 크리시스를 하려면 그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좋아하지도 않는 레이싱 게임을 하며, 그녀가 좋아한다던 만화책을 읽는다.

따뜻한 커피의 신맛을 즐기거나 그녀가 좋아할만한 책을 만나게 되면 흐뭇하게 웃으며, 하루가 끝나는 밤이면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연락이 오지 않았나 살펴본다. 물론 아무런 기대도 없기에 실망도 없지만 행동만큼은 멈출 수가 없다. 또 그녀가 좋아할만한 날씨면 이런 저런 핑계로 한참이나 산책을 한다. 이런 날씨를 보고 그녀가 뭐라할지 상상하며, 그녀와 닮은 이름이라도 스치게 되면 냉정한 마음이 어느사이에 호의적으로 바뀐다.

그녀의 세심한, 아니 날 선, 어쩌면 소심할지도 모를 성격을 알기에 안부를 묻는 인사조차 보내지 못한다. 답신을 보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고 고민할 그녀를 보는 것은 너무 마음 아픈 일이기에 안부 인사를 보내도 단체 문자를 이용한다. 학교에 들려 그녀를 멀리서 보아도 차 한잔 마시자 청할 수가 없다. 안암역 근처에 새로 생긴 스타벅스에 꼭가자 약속했음에도 지킬 수가 없다.

여기 저기 아주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과 부딪치면 한참이나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단 한 잔에 불과할지라도 술을 멀리하는 이유는 술을 마시면 더욱 그녀가 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보고싶다 문자를 날리거나 전화를 걸까 무서워 술을 멀리한다. 근래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꿈을 꾸는 시간이 늦은 아침이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그녀를 실컷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나를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이런 행동을 고칠 의지도 그럴 능력도 없어 보인다. 23살. 혼자만의, 혼자만 간직한 감정이기에 사랑이라 마음껏 부르지도 못하는 23살 어느 남자의 마음이 이것이다. 입으로는 냉정하지만 마음으로는 냉혹해질 수가 없어 혼자 가슴앓이 하는 것이 이 남자의 여름나기였다.

Modified 2005.2.4
르느와르의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림 속 아가씨와 녀석의 버릇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지면 오른손으로 턱을 괴는 버릇과 저 시선은 녀석을 규정짓는 무엇이기에.

어느 사이에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녀석의 인접 거리에 위치한 친구가 아닌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나 역시 그런 격식에 맞추어 행동한다. 가끔은 차라리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도 한다.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는 지금보다 차라리 마음 아프고 힘들었던 옛날이 더 자연스러웠으니까. 결국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든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로맹 가리의 말은 역시 심한 농짓거리였다.

2 thoughts on “진실 혹은 혼잣말”

  1.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은 글이다. 사랑에 빠진 듯한 지금의 내게 전보다 더 의미있는 글이라서.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한 사람을 향하는 소심한 남자의 모습의 전형을 말야. 일상의 일들을 글로 쓰는 것이 화려한 미사어구를 사용한 글보다 훨씬 감동을 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글이다.

  2. 음 난 몇달 만에 읽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저랬나 싶군. 일년이 지난 내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와.

    오늘에 와서는 버스 안에서 커피 마시자는 전화를 받는다고 행복할 것 같진 않군.
    앞으로 그 누가 차를 마시자 청해도 행복해 하진 않을꺼야.
    이제는 혼자 마시는 차가 익숙하고
    혼자 마시기 위한 차 고르는 것이 몸에 베었거든.
    뭐 친구라면 예외겠지만…

    먼 미래에는 그런 전화를 받아도
    되려 귀찮아 귀찮아를 연발하지 않을까?
    근래들어 술마시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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