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ville

도그빌을 보기위해서는 꽤나 오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영화 자체를 보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도그빌을 보는 과정에서 따라올 마음의 움직임을 통제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7월의 마지막주 화요일. 그 날의 약속을 기억이나 할까? 약속과 말, 구속에서 자유로운 사람를 한량이라 부른다던데 아직 나로서는 먼 경지다. 겨우 동네 건달 수준의 나로서는….

(문)정훈군과 헤어진 뒤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겼다. 본래는 노팅힐을 다시 한번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내의 DVD대여점을 들렸는데 전직 파락호 출신인 듯한 주인의 불량스러움에 흥미가 사라져 버렸다. 결국 나는 우산을 벗삼아 장단을 맞추며 집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순간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도그빌의 포스터와 어느 한쪽이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은 그것이 문서에 의해 증명할 수 없는 신사 협정의 경우에는 효력이 없다는 구절이었다.

도그빌은 그것을 대여한 순간부터 나에게 고민을 안겨다주었다. 왜 테이프가 두개인 것이지. 차라리 dvd로 빌리는 것이 휠씬 싸지 않았을까? 근래의 허접한 집중력으로는 테이프 두개를 한번에 보지 못할지도 몰라. 극장에서 봤어야 하는데. 안개 속 풍경처럼 지겹다면 ff를 사용할지 모르겠는걸 그럼 스스로가 궁상스럽지 않을까? 한심한 지적 능력이 부끄럽지 않을까?

라스트 폰 트리에의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그리고 도그마 아젠다의 선언 이후 이를 준수한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번만큼은 분명한 실망감이 든다. 선 블론드의 아름다운 니콜 키드만에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충족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아름다운 여배우에게 받쳐진 재물도 아니면서 어째서 이 대가는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폰 트리에의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번 시도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를 즐기지 않던 사람이라면 알듯 모르듯 다가서는 새로운 장치와 주제에 흥미가 느껴질만도 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폰 트리에를 좋하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현대극의 삭막함보다는 극적 결말에 열광하는 반모더니즘주의자에게 이 영화는 낯선 껍질을 뒤집어 쓴 몬스터처럼 느껴지리라.

연극에는 연극의 장점이 있고 영화에는 영화의 장점이 있다. 순혈주의자에게 양자 사이의 경계를 잃고 방황하는 몬스터는 결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다. 연극이라면 아니 희곡이었더라면 재밌고 의미심장하게 즐겼으리라. 하지만 그가 강요하는 파격 속에서 그의 테크니션에 열광하고 싶지는 않다.

감독은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꾼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과 매체의 정체성을 이용해 가장 효율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한다. 그리고 그가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다른 방법으로 전달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면 분연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예술이란 이름으로 관객의 특권을 배앗을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는 이야기를 가장 적합하고 좋은 방법으로 듣고 볼 권리가 있다. 비록 선 블론드의 니콜 키드만이 전례없이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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