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한 걸음으로 찾아온 가을의 나름함에 함몰되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다. 거실 밖으로 보이는 인근 야산과 뭉게 구름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예전같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저 하늘을 바라보고 희희낙낙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무너진 듯 내리던 비가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술 한잔을 이기지 못할 것이 두렵다는 나의 말이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전주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 속에서, 터미널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1시간 반 동안 아무런 흔들림 없이 음악에 빠져있었으니 말이다.

격한 감정의 흔들림에 힘겨워하리란 믿음과는 달리 너무나 멀쩡한 나를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직관적인 분석에 따르면 술의 질이나 농도, 양 모두 오랜 시간 교육을 통해 형성된 ‘sereno’한 가면을 벗기기에는 부족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만 분석은 분석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하지만 아침 나절의 고민도 커튼을 열었을 때 가슴 가득 들어오는 햇살에 사라져 버렸다. 가슴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가을 바람과 어느 화가도 표현해 낼 수 없는 저 푸르름에 눈이 부신 모양이다. 아직은 체온이 남아 있기에 포근한 이불을 몸에 두르고 뉴욕에서 배달 중인 맨하탄 포티지 백의 트래킹 행방을 쫓으며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이제 갓 만들어진 가방 주제에 23년을 살아온 나의 어떤 여행보다도 길고 복잡한 여행을 즐기다니. 심술이 아주 조금 나려는 참이다.

벌써 오후다. 읽고 있던 상품의 역사를 마무리 지으려던 시도는 누나들이 빌려온 그 남자 그여자의 사정을 보느라 뒤로 미루어졌다. 세 형제가 햇볕이 포근하게 들어오는 작은 방 한쪽 벽에 기대 독화에 열심이다. 나이는 거꾸로 먹는 것인지. 어린 시절에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인식되었던 만화가 어느 순간부터는 심심풀이용이자 가끔은 글이나 영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매체로 승격되었다.

갑자기 일요일이면 들리곤 했던 대학로의 스타벅스가 떠오른다. 오늘의 커피나 민트차와 즐기던 스콘의 맛이 머리를 혼절 직전의 상태로 몰아간다. 그때 iPod가 있었더라면 한결 더 재미났을텐데. 시디피에 바흐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하나만 넣어가지고 가서는 막상 2층에 올라가 버드나무의 푸르른 가지를 보게되면 재즈가 듣고 싶어지는 것은 왜 인지…

소니 롤린스의 색스폰 연주를 듣고 있다. 15살 때부터 꾸준하게 좋아해 온 음악임에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물리지 않아야 고전이라던 친구의 말도 떠오른다. 그의 논지에 따르자면 68년에 녹음된 이 음반도 고전이라 불러줄 수 있으리라.

맛나게 끊여진 홍차 한잔이 음악의 흥을 돋우고 낮잠을 부추긴다. 나름함을 시기하려는 어떤 불온한 시도조차 통하지 않을만큼 완벽한 오후의 햇살도 느릿한 걸음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Modified 2023. 5. 18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이때 산 맨하탄 포티지 브리프 케이스는 지금도 잘 쓰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맥으로 일을 해야 하는 날이면 여전히 나의 대학 시절을 함께 했던 것처럼 출근길을 같이 한다. 오랜 시간 속에서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가끔 시간의 흐름 속에 고정되어 버린 것들도 있다. 마치 이 가방처럼. 마흔셋이 되었지만 여전히 두 대를 위한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좋아하고, 소니 롤린스의 콜로서스 앨범을 사랑한다. 대학로에 마지막으로 간 것은 세 해 전 서울과학박물관에 들리던 길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고, 그때 스타벅스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스타벅스 오늘의 커피는 지겨운 회사 생활의 훌륭한 동료다. 다만 민트차는 티백이 나오지 않는 이후 못 마셔 본 것 같다. 티바나에 있는지 검색 좀 해보거나, 귀국하는 지인에게 부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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