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넋두리가 되었군

나의 원철군에게
외출을 했다네. 늘상 입는 츄리닝이 아니라 구두에 허리띠까지 갖춘 제대로 된 차림새였지. 하지만 친구를 만나는 것도, 사람을 소개받는 것도, 서점에 가는 것도 아닌 평범한 심부름을 하기 위한 외출이었는데 면도까지 하고 집을 나선 내가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난 까닭을 알 수 있었네. 너무나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눈부신 햇살에 대충 입은 동네 건달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야. 이렇게 좋은 날씨에 띠없는 츄리닝에 폴로 셔츠,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뻔하지 않겠냐. 지금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숨기기 위한 분장이 필요했던 셈이지. 하여튼 간만에 차려입고 집을 나서니 한가롭게 학교까지 걸어다녔던 일이 생각났네. 까닭없이 기분이 좋아져 말까지 친절해지더군.

은행에 들렸네. 통장을 정리하기 위해 들린 것이었는데, 그곳에 앉아 있던 텔러를 보고 낯이 있다는 생각을 했네. 눈이 마주쳤고 한참이나 마주 쳐다봤지. 하지만 자네다 알다시피 내가 시선 처리에 곤란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잖나. 결국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더군. 그제서야 난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났다네.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던 옛 친구의 친구였지. 이 시간에 여기는 왠일이냐는 질문에 휴학을 했다고 짧게 대답을 한 후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네.

은행을 나와 서실까지 걸어가는데 그 옛 친구가 다니던 학교가 나왔네. 쉬는 시간인지 여고생들이 한무리가 돌아다니더군. 불현듯 야자를 튀고 그 친구의 페이저에 매세지를 남기던 일이 생각났네. 한가롭게 산책을 했던 일도, 우동을 먹던 일도, 서점에 간다는 핑계로 학교를 빠져나와 그 친구와 손을 잡고 다녔던 기억이 생각났네. 조금은 소식이 궁금했다네. 대학에 오고나서 스쳐본 일도 없거든. 혹시 스쳤다 하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흐릿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가지 깨달은 바가 있네. 내 기억이 흐릿한 것은 내가 그 친구보다 산책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산책을 하면서 느낀 것은 생생한데 그 친구의 목소리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그런 사실의 반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네. 장갑 낀 손바닥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지만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늘상 앞만 보고 걸었기에 그 친구를 바라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네. 서실에 가기 전에 부딪친 우연한 만남이 트리거 이펙트를 일으켰다는 것은 분명한데 스스로를 자책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나봐. 스스로는 저렇게 무정하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 사랑만큼은 누구보다 많이 받고 싶어하니까.

자네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지선군의 전화를 받았네. 그녀가 보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가슴이 떨렸네. 왜 아니 보고 싶겠나.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 걸. 평온한 표정 뒤에 숨겨진 다른 얼굴은 항상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왜 아니보고 싶겠나. 나라고 왜 이번 주말에 달려가고 싶지 않겠나. 자네와 그녀 그리고 지선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찬스인데.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네. 우선은 내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흔들렸기 때문이지. 아주 오래전 나부터 오늘의 나까지 한번쯤은 천천히 살펴보고 싶어. 매번 우울하고 힘든 작업이지만 나를 알아야,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야 자신있게 자네들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려워. 나에 대한 자신감없이 정신에 데미지를 입게 된다면 나란 그릇 자체가 깨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내가 옛 친구에게 저질렀던 것 같은 냉정함이 부메랑이 되어 나를 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일어날 수가 없거든.

다음 문제는 비겁함과 우아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혐오감이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내가 가진 인간적인 약점을 파고드는 것 같아. 존재를 증명할 기회는 충분히 주었다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용납하지 못할 수준의 실망감이었어.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행동과 경우뿐이라네.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내가 언제까지 모든 것을 참아주고 받아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난 그것을 알려 줄 능력도, 여유도 없다네. 자네가 아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쓸모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잖은가?

나를 굽힐 수 없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친구가 아니라네. 요컨데, 내가 굽힐 만한 가치를 지녔다면 이미 내쪽에서 먼저 손을 들었을거란 셈이지.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거든.

가장 정직한 것은 마음이라네. 난 자네들의 하루하루가 궁금하고, 자네들이 매일같이 보고싶다네. 먼저 말을 걸지는 않지만, 먼저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항상 자네들을 보고싶어 하고, 내 삶을 알리고 싶어해. 자네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면 마음이 따스해지거나, 안타깝고, 때로는 슬퍼지기도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어. 머리속이 너무 헝클어진 지금으로서는 깨지기 쉬운 자기로 된 내 정신이 보호받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나를 다스릴 시간이 필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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