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고 마냥 좋을 수는 없구나

모대학의 도서관에 왔다. 부탁받은 책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에 껄스러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서고에 들어오고 나니 내 걱정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걸 인식하게 된다.

한층이 통째로 터져 있기에 한 400평쯤 될 이 층에 있는 사람은 네 사람 정도다. 물론 직원들은 빼기로 하자. 이 사람들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키는 사람들이니까. 방학도 아닌 학기중에, 주말도 아닌 수요일 오후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양성보다 양 위주로 수집된 책들 때문에 이용자가 적은 것일까? 아니면 이 곳 학생들은 원래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 천성을 가진 것인지 갈피를 못잡겠다.

결국 난 도서관에 대한 특유의 감각으로 가장 바람이 시원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를 내 자리로 잡았다. 70년대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에 놀라면서 21세기 산업디자인의 총아로 불리는 내 애장품을 보고 있자니 시간 감각이 둔해진다. 문득 서가에 놓인 책들이 불쌍해진다.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못하고, 조용히 수명을 다해가는 저 책들을 녀석들을 내 핏방울 만큼 사랑해줄 나한테 넘겼으면 하고 생각한다.

창밖을 한번 내려다 본다. 젊은 웃음 소리가 들린다. 서늘한 가을 하늘이 가슴 시리도록 푸르게 펼쳐있다. 이런 날 어째서 나는 외로움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저렇게 시리고 맑아 저것을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심심함을 느끼지 못할 이런 날씨에 말이다.

더블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다. 진한 에스프레소가 입안 가득 신맛과 쓴맛, 떫은 맛을 내며 퍼지는 순간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머리속이 어지럽다. 다 녀석 탓이다. 어쩌자고 겨우 진정시켜 놓은 커피에 대한 내 욕구의 버팀목을 쓰려트려 버렸는지. 182페이지에 멈춘 책장은 카페인이 공급되기 전까지는 이대로 멈춰있을 듯 싶다.

혼자라는 상황이 슬슬 지겨워진다. 아직까지도 목이 풀릴 정도로 말을 하지 않아 성대가 뻣뻣하다. 고작 세마디 밖에 하지 않았으니 풀릴 턱이 없잖지만. 혼자라는 상황을 깊게 인식할 수록 보고픈 마음에 외로움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머리속의 나는 소강당에서 미니스탑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런 날씨라면 그곳이 가장 예쁠거야라고 생각하며, 원철군과 데자와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던 소강당 앞의 벤치도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인각과 의학이라는 수업을 한 학기 동안 소강당에서 들으면서도 그 벤치에는 단 한번도 앉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긴 사람들의 뭇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될 그런 벤치를 선호할리 없으니 앉아 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지 모르겠다. 운명은 항상 나한테만 가혹하다. 단지 잘 이겨낼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이유인가? 단지 잘 견딜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감내하라 말하는 신이 밉기만 한다. 나의 증오를 태연히 받아내는 그 시선조차 밉다. 이렇게 날씨 좋은 어느 가을 오후 난 무슨 중대하고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외로움에 허덕여야 한단 말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해져 버렸다. 우울해지면 안되는데. 나의 우울함을 안타까워하고 걱정해줄 친구가 있기에 우울해져서는 안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느낄 따름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 보고 오늘 다시 보는 것처럼, 넉넉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우울함의 찌꺼기를 태워버릴 시간이 필요하다.

글을 마무리 짓고 느릿한 걸음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도서관에서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는 경영관에서 안암로터리의 끝까지 가는 거리보다 약간 더 멀다. 무슨 행사라도 하는지 무대를 만들고 있었다. 잔디밭 누워있는 사람들, 춤연습을 하는 사람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낯선 풍경이다. 3년이나 학교를 다녔지만 한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 이곳에서는 일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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