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앞에서는 웃지 말자. 그 꽃이 순진하다면 더더욱…

사람은 누구나 다른 신체 기관보다 날씨에 민감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추위에 특별히 민감한 부분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왼손 새끼 손가락이다. 물론 날때부터 새끼 손가락이 민감했던 것은 아니다. 14살 봄 왼손 새끼손가락의 끝마디가 cutting당하는 사고가 난 뒤에 얻게 된 생활의 불편함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10월부터 3월까지 새끼손가락의 보온을 위한 갖은 꼼수를 다 동원하곤 하는데 장갑끼기, 새끼손가락을 안으로 말아쥐기, 따뜻한 커피잔 들고 걷기 등이다. 아무튼 오늘의 사건에는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와, 서실에서 묻은 먹물, 그리고 젊은 사내둘의 헤픈 웃음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성격 탓인지, 아니면 타고난 소심함 때문인지 난 서예를 배우면서도 손에 먹물이 묻는 경우가 없다. 왼손으로 먹을 갈고 오른손으로 붓을 잡는 분업 프로세스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그 드문 일이 일어났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붓에 먹물이 충분히 먹지않았고 어느 순간 붓이 갈라지고 만 것이다. 벼루에 먹물이라고 많았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먹물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평소의 머리였더라면 붓에 물이라고 먹였겠지만 잠시동안 찬 비바람을 맞은 까닭으로 머리까지 굳어버린 듯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손가락으로 붓끝을 모으는 가장 야만적인 짓거리를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왼손은 먹물로 범벅이 되었다.

뒷정리를 하면서 세수를 했는데 새끼 손가락의 봉합면을 타고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 비오면 기온이 떨어진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군. 제길 집에 갈때가지 고생 좀 하겠네.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도 없고….

사실 서실에서 내내했던 딴 생각은 7월부터 읽고 싶었던 방각본 살인사건을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사실 난 우리 소설을 구매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나의 도서 구매 윈칙이라는 것이 매우 복잡한 까닭으로. 아무튼 이것은 다음에 기회를 봐서 자세하게 언급을 하리라. 결국 손에 먹물까지 묻히면서 내린 결론은 내주에 훈련소에 들어가면 최소한 한달은 책하고 담을 쌓아할텐데 이 정도 선물이야 해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였다. 결국 친구를 불러내 서점에 갔다.

집에 들어오려는데 손가락이 시려웠다. 결국 우리는 한 테이크 아웃 커피점에 들어가 아메리카노와 핫초쿄를 주문했는데 사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조금은 험난한 인상의 나와 웃는 인상이 선한 미청년인 내 친구의 주문을 받은 아르바이트생이 당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살짝 눈웃음치며 시럽은 빼달라고 점잖하게 말하는 녀석. 녀석의 표준화된 작업 프로세스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일만큼 얼굴이 달아오른 그 아르바이트 여자분은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귀까지 빨개진 귀여운 얼굴이라니. 나로서는 자주보는 녀석의 말투에 그저 느끼하다라는 생각만 들었지만 핸섬하게 생겨주신 그 얼굴이 던지는 말인지라 느낌이 다른 모양이다. 거기에 상대적으로 위압감 넘치는 내 얼굴이 바로미터가 되주니 녀석이 더 빛을 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러던 순간에 에스프레소가 뽑혀져 나왔다. 나의 난쟁이 유전자를 능가하는 친구의 한마디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너 아직도 더블샷으로 마시냐? 그 순간 움찔하는 그녀가 보였. 얼른 에스프레소를 한 샷 더 추출하려는 듯 손이 분주하기만 하다.

나보더 어려보이는 외모에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 잠시 헤프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웃음이 끔찍한 화를 불러왔다. 알다시피 보통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1온스에 7온스의 따뜻한 물을 섞어 중화시키는 것이 아닌가?(8온스 기준) 그런데 당황한 그녀가 만든 아메리카노 더블샷을 뛰어넘은 트리플 샷 수준이었다.

사실 에스프레소를 그 자체만으로도 가끔 즐기는 나이니 트리플 수준으로 만들어졌다 해서 못마실 이유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겠지만 에스프레소 자체만 즐기는 경우는 커피맛에 대한 확신이 있는 가게에서나 하는 행동이다. 한번도 맛본적이 없는 집에서 에스프레소을 샷 그대로 마시는 것은 자살행위다.

차라리 그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끔직하지는 않았을텐데.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기가 질린 내 모습과 의외의 상황에 당황해하는 친구는 나한테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너무 전화할 때 있다면서. 응. 전화기를 꺼내 나가려는데 친구의 새초롬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진해보이는데요.

불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오 신이시여. 당황한 그녀는 트리블 아메리카노 불러도 할말 없을 그 커피를 다른 잔에 나누고 있었다. 절대 덜어낸 것이 아니다. 컵안에 가득 담긴 그 커피를 나누고 있었다. 덜어내고 물을 더 넣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누어 담고 있었다. 농도가 나눈다고 낮아지는 것은 절대 아닐텐데. 저런 느끼함에 왜 이리 당황해서 나에게 끔찍한 고통을 준단 말인가? 난 겨우 한번 웃었을 따름인데.

휴대폰을 억지로 가방에 밀어넣었다. 조금은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반박 섞인 얼굴로 그녀가 물어왔다. 설탕 넣어 드릴까요? 휴. 결국 친구와 나는 트리플 아메리카노 두 잔과 핫쵸쿄 한 잔을 들고 가계를 나왔다.

하지만 나의 고통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너무나 당황한 그녀는 컵홀더를 빼먹은 채 컵을 나한테 건넸고 손가락에 아찔한 고통이 밀려왔다. 컵홀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순진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차마 그 컵을 안받을 수 없었다.

신이시여 왜 나를 벌하시나이까? 난 요놈처럼 뺀질한 것도 아니고 항상 신념에 충실했단 말입이다. 요즘들어 조금 신념이 꺽이기는 했습니다만 오는 여자 안막고 가는 여자 안막는다는 신념아래 한 눈 한번 안팔았던 저랍니다.

사내와 커피를 마실 때에는 세번 생각하고 들어가라던 옛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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