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리다

생각은 이제 새로운 막으로 걸어들어가야할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걸음은 여전히 머뭇거린다. 7월 20일 주영군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언급했던 막간극을 끝내야하는 시점에 왔는데도 여전히 걸음은 멈짓거린다. 이번이 나에게 주어진 세번째 막간극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첫번째 막간극은 수능이 끝나고 재수를 시작할 때까지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진토닉과 몰타크로스, 브람스의 클라리넷 4중주와 산책으로 요약되는 그 막간극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어렵게 기억을 되새긴다면야 기억하지 못할리 없겠지만 그 시간을 반추하는 것은 여전히 심리적으로 부담스럽다.

하지만 두번째 막간극은 첫번째에 비해 무척이나 유쾌하다. 연인과의 산책, 찻잔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쾌한 상상력을 지닌 애인의 존재에 행복했고,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두운 그림자를 내포한 불안전한 행복이었음이 틀림없다.

어리석고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힘들게 내민 그 손을 명쾌해야한다는 이유로 붙잡지 않았다. 다음막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렸던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한해가 흐르고, 또 한해가 흐르고, 다시 한해가 흘러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이면 미안하단 말을 건네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난주에 깨달았다. 서른까지 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업어가겠다는 호언은 이제 말장난이 되어버렸다. 과거를 털어버린 그는 이제 유쾌한 비밀 친구가 되었다. 여전히 눈물 많고, 소녀처럼 여리지만…

이번 막간극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몇년쯤 시간이 흐른다면, 지금을 평가하는 글을 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뭐라 말해야할지 난감하기만하다. 하지만 아직도 걸음이 머뭇거린다는 사실. 스텝이 볼썽사납게 엉키는 것은 아직도 미련이 많아서란 사실. 이 두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막간극을 끝내고 다른막이 시작되면 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테지. 지난막에서 보여줬던 나와는 또 다른 삶을 살게 될것이다. 다른막이란 단순히 환경이 변하는 정도라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 가짐이 변하는 것이니까.

막간극이 끝나기까지 한주 가량 남았다. 7월 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딱 한분기의 시간이었다. 제법 긴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떨쳐버리기에는 불충분한 시간이다. 지금 나를 붙잡는다면 내 인생 전체를 줄 수 있다고 마음은 외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를 않는다.

다음막에서는 나를 항상 조롱하던 그 인격이 내 정신을 소유할 차례라고, 사기와 기만의 대가이자, 기대와 꿈이라 말을 가장 증오하는 그 인격이 나를 차지할 차례라고. 그래서 이렇게 걸음을 머뭇거리노라고 말하는데 귀를 열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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