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각본살인사건

처음 이책을 만난 것은 강남 교보문고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헌절 다음날인 7월 18일 마지막 남은 중급회계 시험을 치르고난 뒤 난 조금은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몇달 전의 나로서는 제법 큰 타격이었다.(아니다. 지금도 웃어넘길 수 없다)

뭐랄까? 난생 처음 난 내 존재가치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땅을 밟고 있던지 항상 지지는 않으리라 믿었던 자신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눈부처에 담긴 모습을 확인할 자신도, 권리도 없음을 깨달았음에야. 잘나가진 못해도 어디에도 슬굴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스물셋 젊음에게 찾아온 짧은 시련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그 당시의 내게, 잠시나마 혼백이 완전히 마비되었던 그때 눈에 띈 책이 바로 이것이다. 첫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예사롭지 않았는데 물론 독창성에 반한 것은 아니다. 내가 즐겨읽었던 수많은 소설의 번안본인 이 소설에서 독창성을 찾는 것보다는 그 차용을 찾는 것이 더 재미난 일이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른다해도 결코 빛이 바래는 책은 아니다. 오늘의 작가라 불리는 세대가 구사하지 못하는 단아한 문체와 재치있는 플롯(여기저기서 복사한 것 같다. 뭐 작가가 아니라고 우기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문제겠지만) 거기에 눈에 보이는 현실처럼 상상력의 폭은 넓고 세세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시대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길을 수없이 걸어봤기 때문이리라. 또 다른 주인공 화광 김진의 움막을 찾아가는 길이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배고픈 주인공이 추락사할 뻔한 그 암벽이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살던 옛집에서 그곳이 보이기 때문이리라.

내 큰누이라면 2장에서 바로 범인을 알아차릴 것이고, 3장을 넘기기전에 너무 추리가 쉽다 선언할 것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소설의 흡입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작가의 선택으로 보인다.

바보가 아니라면 1권의 전반부에서 감이 잡히는 범인을 우리의 어리숙한 주인공(주인공 겸 관찰자이다)은 번번히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와 관찰자(관찰자 겸 주인공이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추리력의 우위는 되려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다들 손쉽게 범인을 짐작하고 어떻게 이것을 증명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의 주인공은 사랑 문제에 힘들고, 백탑파에 조금씩 매료되고 있는 상황이니까.

사실 두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후반부보다 전반부가 휠씬 재밌다. 백탑파에 속한 저 불우한 천재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소설에서 맡은 상징과 메세지를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떨려온다. 직접적으로 무엇은 무엇이다하고 말하지는 않지만 인물들을 통해서 느끼고 생각하는 숨겨진 문제들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은 조금 비싼 소설이다. 영 정조 시대의 역사에 해박하고, 조선 후기의 학문적 흐름에 관심이 있다면. 수많은 학자들의 저술을 전부 읽지는 않았더라도 호만으로도 인물을 추리해 낼 수 있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을 되새길 수 있다면. 이곳저곳 언급되는 서책들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이 소설은 재미는 가히 폭발적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이 비싼 소설을 이해하기란 조금 버거워 보인다.

사실 내가 이 소설을 비싼 소설이라 언급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뭐랄까? 개인의 고독감과 정신적 공허, 사회와 가족의 해체같은 네거티브한 주제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 고민하도록 강요하는 주제는 조금 넓고 긍적적이다. 신념과 우정. 꿈이라는 단어. 이런 단어를 고민하고 그 짜릿함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조금 비싼 수업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이런 비싼 수업료를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자신감과 믿음을 지닌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덧붙임말: 절대 하권 맨뒤에 위치한 작가 서문은 읽지 말기를. 자칫 재미나게 읽었던 소설의 재미가 확 날라갈 수 있다. 백탑이란 말을 헌사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세대에게 받쳐진 이 책이 정말 아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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