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분위기 한번 연출해 볼까?

암울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지금 나는 어머니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최고의 요리 비결이란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아~ 저렇게 만들면 편하겠네. 스물 세살 먹은 아들과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의 요지다. 지금은 호박 푸딩과 밤 케이크를 만드는 시간인데 저 요리사의 뽀인트, 뽀인트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누이들이 퇴근하기 전이라 점심은 호박죽으로 패스하기로 어머니와 묵계를 보았다. 아침은 늦잠을 자다가(3시에 자서 10시에 일어났다) 놓쳐버렸고, 토마토 주스 한 잔(말이 한 잔이지 500cc쯤 된다)을 마시고 났더니 밥 생각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런 주말 너무 나른하고 행복하다.

오랜만에 질좋은 편지 봉투를 샀다. 대례지 분위기가 나는 고급 편지지도 샀다. 지난 3개월 동안 글적거려놓은 글들을 인쇄하고 노트북 속에 담긴 데이터도 전부 백업해 놓아야 하는데 나름함에 취해버렸는지 움직이기가 영 싫다.

신문사에 보관했던 책들이 오늘에서야 집에 도착했다. 책장에 옮겨놓고나니 책이 제법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한권 한권 손가락으로 매만져가다보니 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책은 신기한 물건이다. 단지 책속에 담긴 내용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던 당시의 상황과 추억까지 함께 되새겨 주기 때문이다.

전공과 관련된 책들로 조금 작은 책장 하나가 꽉 찬다. 책장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풍요로워 진다고 말했던 이는 소유의 기쁨을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책장은 단순한 책을 보관하는 가구가 아니라 정신적 부의 상징이라는 말에도 거듭 수긍이 간다.

사실 한껏 암울하게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했는데 커피 한잔과 10% 늘어난 새로운 홈런볼을 까먹으며 마냥 즐겁기만 하니 큰일이다. 친구들은 한참 중간고사로 시달리는 이즈음 여전히 난 책과 벗하고 브리티쉬 팝을 들으며 한가롭게 소설을 읽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관을 감상하고 토요일 오후의 나름함에 조금씩 조금씩 젖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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