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사진

막내 누이는 이 사진을 보면 늘상 달력 사진같다고 한다. 물론 나역시 수긍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왼쪽 상단 여백에 숫자를 가지런하게 적어넣으면 완벽한 책상용 달력이 되리란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란 어리석은 짓일테니

달력 사진이란 약칭으로 불리는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지난 시간과는 무언가 다른 것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 막간극이 끝나고 새막이 오르는 듯한 분위기. 그래서 난 이 사진을 좋아한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일요일 아침마다 집에서 대학로,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산책을 즐기곤 했었다. 대학로 스타벅스 2층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바라보며 차를 한잔 마시고 느긋한 걸음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연결하는 돌담을 걷고 있노라면 한주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 들곤했었다.

날씨 좋은 날에는 서브웨이에 들려 샌드위치로 식사를 대신하고 옛 궁궐의 정원에서 재미난 소설을 즐기기도 했던 것 같다. 어떤 날에는 포션에서 로스팅한 애플티를 즐길 수 있는 찻집에 홀로 걸어들어가기도 했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알게된 사람들과 안국동에서 인사동. 영풍문고로 이어지는 미로들을 탐험하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지난 겨울. 인체의 신비전을 보고 창덕궁에 들렸다가 얻은 것이 바로 이 달력 사진이다. 아주 얇은 안개가 낀 맑은 겨울날. 서울대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그 날 얻게 된 사진이다. 빛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어둡지는 않고, 시간의 흐름을 탄 옛 것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유의 톤이 있다.

나를 지나쳐 버린 여러 막들과 몇번의 막간극들. 고유의 색감을 지닌 이런 고즈녁한 분위기의 기억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안개 속 사이에 숨어버린 빛처럼 그렇게 내 안에 숨어 새로운 삶을 지켜봤줬으면 좋겠다.

2003년 10월 19일 아무것도 얻은 것은 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더 잘알게 해준 막간극을 끝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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