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를 마치고

원철군에게
편지는 잘 받았네. 훈련소에서 받은 편지인지라 정말 감회가 새롭더군. 감회가 새로운 만큼이나 마음을 움직이는 정도도 남달랐어. 하지만 우리가 여태 주고받은 편지가 그만한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라네. 이 편지를 받은 상황과 여러가지 감정적 요인들이 수용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조금 더 올바르게 만들었나봐.

잠자리에 예민한 나로서는 옆자리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움직임이 있다는 것 자체를 참아낼 수 없기에 기나긴 불면의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자네 편지가 그 긴긴 불면의 밤동안에 할 일을 만들어 주었네. 더할나위 없이 잔인한 일이지만 꼭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처리할 시간적 배경이 된 셈이지.

마침내 때가 왔음을 깨닫고 한달이란 휴가를 이용해서 조금은 선량해 보이는 품을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네. 과거의 기억들과 추리에 의해 얻어진 여러 진실들을 눈앞에 펼쳐놓고 그것을 메스삼아 이전의 인격을 찔러댔네. 처음에는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가 올라올 정도로(농담 아니네) 마음 아팠는데 차차 고통에 둔감해지더군. 그러더니 언제쯤부터인가는 조금 다른 성격의 사람이 내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네.

음.. 놀라기는.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한 고통쯤은 감수해야하는 것이 인생의 순리라네. 비록 아무리 쓸모없는 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잃어야하는 것이 있는데 내가 얻으려 하는 품은 상당히 유용한 품이 아니겠나? 그러니 이 정도 고통은 웃는 얼굴로 감수해야지. 그렇지 않은가?

어제 잠깐 테스트를 해보았는데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쉽게 감동하고, 쉽게 아름다움에 취해버리던 난 어디론가 사라진 듯 하다네. 혈관 속에 도는 피가 몇도쯤 차가워진 것 같아.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내가 소유해야 할 것들이고, 무너트릴 것들 뿐이라네. 조금은 매몰차다 해도 너무 힐난하지는 말아주게나.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그토록 긴 시간을 보내면서 범인은 아니라 믿었던 내 자신이 얻어낸 결과물의 빈약함에 놀라서 그러는 것이니까.

처음에는 작은 고민으로 시작되었는데 종래에 이르러서는 정신적 고문이 되어버렸네. 나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사실들을 흉기삼아 가해지는 고문이었던지라 솔직하게 견디기 힘들었네. 그냥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 과거의 나와 내 모습이 이런 폭언을 견뎌야 할 정도로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항도 했네.

하지만 반항하면 할수록 우습고 구차해졌어. 세상 전부를 속여도 스스로만큼은 속일 수 없는 법인데. 손으로 태양을 가려보려는 어리석은 아이처럼, 그토록 어리석은 짓을 다시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네.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하는 인간이라. 이런 인간에게 사려깊다라는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

우울한 이야기라고,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속단하진 말아주게나. 아무튼 이런 과정이 4주동안 내 정신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다시 나에게 두꺼운 껍질을 입혀놨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제된 감정의 가면이 얼굴 위에 덧입혀졌네. 자네가 처음 본 내 모습에 조금 근접한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될꺼야.

부러진 갈대처럼 처량하고 약한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네. 들은 바 그대로, 들은 그 목소리대로, 지금의 나에게 후회나 번민따위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네. 그런 무거운 것들까지 짊어지고 다니기에는 이미 너무 무겁지 아니한가?

더 이상 꿈을 꾸지도 않아. 꿈이란 사치는 포기했다네. 인생이란 꿈꾸면 꿈꿀수록 현실에서 멀어지고 종래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꿈꾸고 몽상에 젖어있을 시간에 현실을 조금씩 움직여볼 생각이야. 꿈꾸지 않은 영혼이야말로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들 하지만 현실을 망각한채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바보보다는 조금 더 나른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살아갈수록 많은 책들을 읽어갈수록 어떤 운명같은 메세지를 지닌 책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졌네. 머리가 커졌는지 저자들의 비판하는 능력이 생기면서 조금은 까탈쓰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열살 무렵의 내가 읽은 책가운데 가장 감명깊었던 책은 러시아 동화집이었네. 책 제목은 러시아 동화집인데 그 안에 실린 이야기들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문호들의 단편들이었지.

그 책에 실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바보 이반을 읽고 고민하던 내가 생각나네. 지금도, 어쩌면 임종이 목전에 다가올 때까지도 모를 그 단편들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던 열살의 소년이 지금은 이렇게 변해버렸군.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 정답을 안다면, 세이경청할테니 누가 나한테 귀뜸이라고 해줬으면 좋겠군.

얼마남지 않은 군생활 무사히 마무리 짓기를 바라며. 자네의 익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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