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 찻잔 하나에 괴로워 하다

비를 맞은 후유증인가 보다. 여태 피곤을 모르던 몸이 자정을 넘기기도 전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려 한다. 여름에 맞았던 비는 상쾌하기 그지 없었는데 늦가을 어두운 구름을 배경으로 내린 비는 뼈속까지 시리다.

지난 일요일에는 전주에 갔었다. 눈감고도 걸어다닐만큼 익숙한 거리와 좋아하는 장소로 가득한 곳이지만 사실 쉽사리 걸음이 옮겨지는 곳은 아니다. 뭐랄까? 머리 속 깊이 숨겨둔 형태모를 상자 하나가 열리면서 듣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20살의 나를 되살려 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닐까?

한적한 골목길과 담벼락을 따라 객사까지 가는 길의 작은 간판 하나, 학교 담벼락의 작은 낙서까지 기억하고 있는 나이기에 더더욱 발걸음이 무거운지도 모르겠다. 모든 길에는 하나의 추억과 하나의 삶, 그리고 하나의 죽음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무슨 소리인지…

난데없이 보고싶은 사람이 있었다. 10월의 어느 수요일 저녁. 시험 공부로 바쁜 그네를 납치하다시피해서 저녁을 같이 했었는데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다니 그네가 다시 생각났다. 그리운 마음에 전화를 했는데 휴대폰이 꺼져있단 메세지만 공허하게 귓가를 울린다. 순간 이것이 어떤 운명의 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전화를 걸 때마다 항상 그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전화 안받기로 유명한 나임에도 그네의 전화는 단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레 전혀 상관없는 운명을 지닌 사람들처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네는 모르겠지. 그 전화가 마지막으로 그네의 목소리나마 들어보려던 까닭에서 건 전화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숙명은 나한테 그 마지막 목소리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가장 잔인한 고통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확신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무딘 양심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일테지만 스스로에게만큼은 정직하도록 교육받은 나로서는 견뎌낼 수 없는 타격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혹시 이럴지도 모르겠다하고 두려워하던 가설들이 진리로 변한 순간의 타격은 범상한 두뇌를 혼란 상태로 몰아간다. 인생 전부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듯한??충격이다,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 경기전 옆의 사라진 찻집에서 자주 보았던 컵을 발견했다. 다신 경험할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렸기에 가슴이 조금 시리다. 생각했던만큼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단 사실이 이런 기분을 가져다 주는지도 모르겠다. 늘 착한 찬익군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이번만큼은 내가 얼마나 나쁜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늘상 마음의 작은 쓰임새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호언했었는데 정작 숨기고 싶은 마음의 쓰임새만은 외면했던 어리석은 이가 나였다니.

어쩌면 이 찻잔이 이제는 사라진 그 찻집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어쩌면 그네의 입술이 닿았을지 모르는 찻잔이라고 생각하자 미안함에 심장까지 저려온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 된다면 이렇게 말하지도 모르겠다. 몬테크리스토백작이 메르세데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런 이야기는 20살 넘은 남자들에게는 아무일도 아닌 이야기죠’하고 말할 순간이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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