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2

기다림. 그리고 사티에
지선군의 과외는 언제 끝날지 미정이다. 다른 장소였더라면 시간을 어찌 보낼까 고민했겠지만 서점이라면 이런 고민이 따라붙지 않아서 좋다. 서점이라면 보름쯤 가두어둬도 지루해 하지 않으리라. Public service에 대신 서점에 2년 동안 처박아 둔다 하더라도 기꺼이 참아낼 수 있을 터인데.

어린 시절 나중에 세상에서 제일 큰 서점을 가지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서점은 수익성이 높지 않은 사업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큰 서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도 난감해졌다. 반스 & 노블일까? 아니면 아마존일까? 아니면 스크림너 책방일까? 이런 회사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필요할까? 꿈은 꿈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꿈을 실현하려고 잠시 어리숙한 머리를 굴리면 꿈은 허황된 몽상으로 변해버린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사이언픽 아메리칸을 꺼내 들었다. 이번 달 특집이 항공기였던 까닭으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6~17살 재능도 없으면서 항공 공학에 매료되었던 부끄러운 시기가 기억 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렇게 부끄럽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작고 아름다운 라팔에 매료되었던 옛 삶이 무엇이 그리 부끄러울까? 그보다 더 값어치 없고 쓸모없는 것에 매료된 적도 셀 수 없이 많은데.

항공 특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무렵, 그리고 아직도 과외중인 지선군의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Gymnopedie N3이 들려왔다. 사티에, 불현듯 까맣게 잊고있던 둘째 누나의 부탁이 떠올랐다. 아이작 스턴의 위모레스크 앨범을 사오랬지. 그 속에 담긴 14번 트랙이 사티에의 것이었어. 바로 이 곡이었지. 사티에에 대한 전기 소설 한편도 생각났다. 20살인가 21살에 나온 음악소설이란 장르였는데… 그리고 초희가 사라사테를 좋아했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기억을 회복할수록, 기억에 관대해질수록 남는 것은 조금씩 무너지는 자신이다. 왜 내 기호가운데 진정한 나만의 것은 없는 것일까? 홍차와, 커피, 음악, 색상, 선호하는 디자인과 풍경까지 어느 것 하나 나만의 것이 없다. 나만의 것이라면 체스에 대한 숨겨진 열정과 명당파에 대한 애정이랄까?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책에 대한 기호마저도 나만의 것이 없다. 휴~ 조금은 삐뚤어진 삶이군.

핫트랙에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생각이 잠시 딴 곳으로 빠졌다. 이곳에서 수많은 통화를 나누었지만 내 마음을 기쁘게 만들었던 통화는 딱 한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오래 전인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그때는 분명 기뻐했던 것 같다. 그 한번을 제외하면 늘상 우울함만을 안겨주었던 이 공간을 계속 찾는 것을 보면 이 공간에는 발걸음을 머물게 하는 묘한 주술적 효과가 매겨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작 스턴의 위모레스크를 다시 샀다. 사티에의 Gymnopedie를 다시 듣고 싶었지만 아이포드 안에 유독 이 곡만은 담아두질 않았다. 어쩌면 지난 일년동안 이 곡을 꺼려했던 이유를 내 마음은 아주 명백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편지 한장에 기뻐하고 갬비트에 열광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넓은 들판이 보이는 창가에 서서 워크맨을 듣고 있는 모습과 영어사전에 숨겨진 사진을 꺼내보는 모습도 떠올랐다. 그해 12월이 유난히 힘겨웠단 생각도 들었다. 다음해 일어났던 짧은 접촉 사고도 생각났다. 그리고 긴 망각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갑작스레 은비령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바람꽃에 대한 생각도 난다. 바람꽃을 생각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누리고자 노력했던 행복도 바람꽃처럼 희미해질거란 생각이 든다. 11월 30일 하오 4시 5분. 내가 그토록 찾아해맸던 바람꽃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핼리 혜성처럼, 바람꽃은 일생에 오직 한번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지선군에게 메세지가 도착했다. 이제야 과외가 끝났노라는 전갈이다. 발걸음이 가볍다. 바람꽃이 사라졌노라 말하면 나를 미친놈 취급하겠지만 꼭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오후다.

-새벽 두시 반 기차 속이다. 결국 난 바람꽃의 한 낱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 생각되던 많은 것들이 더 이상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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