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지만 하늘은 맑구나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어. 머리속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어떤 마음에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 않거든. 스스로에게 조금쯤은 화가 나기도 하고, 가끔은 외롭기도 하지만 결코 이런 감정들이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야. 아무런 감정의 유동이 없는 가운데 생기는 작은 흐름 정도에 불과하거든,

전체 정신으로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인데 목에 걸린 가시처럼 조금 신경은 쓰이네. 전혀 신경 안쓰이는 감정의 유동이라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을테니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라네. 하지만 뭐랄까? 어느날 자네를 만나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한없이 웃음만 나올 것 같네.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쏟아지는 웃음에 생각도, 의지도 전부 흐물흐물해질 것 같아.

지난 목요일날 내 목소리에 아주 조금이지만 아쉬움이 배어있다고 했었지? 자네 말이 맞아. 조금은 아쉽네. 전혀 아쉽지 않다면, 또 아무런 감정의 찌꺼기도 묻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이겠나. 하지만 늘 그렇듯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네. 당황스럽지도 않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니까 그리 힘들 것도 없네. 그러니 내 미리 준비를 하지 않았던가? 긴 시간동안 내가 갖춘 준비 누구보다도 자네가 잘 알고 있잖나?

한주동안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네. 뭐 쓸 의지가 없어라기 보다는 다른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지. 재정학의 공공선택과 정부지출 챕터와 씨름하며 최고의 유희를 즐겼다네. 레베르떼의 소설도 한장 한장 음미하여 읽어주었고 자네의 승주씨가 달아준 답글도 매우 즐겁게 읽었다네. 어째 자유의 몸이 된 자네의 삶이 너무 행복할 것 같은 불길함 예감이 들더군. 좋은 친구를 둔다는 것. 아껴달라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아낄줄 아는 친구를 갖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최고의 복이 아닐까 싶어.

아낌받지 않는 것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는 생각. 자네와 승주씨의 우정을 보고 있자니 반드시 고쳐야할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군. 아낌받지 않는 친구사이의 우정이라는 것은 사상누각일 따름인데 왜 난 이렇게도 오만할까? 타인의 행동이나 생각같은 것은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제로 행동하잖나. 이것은 배려가 아닌 지독한 오만일지도 모르는 것인데… 아무튼 조금은 부러웠네. 아니 심술날 정도로 부러웠어.

근래들어 다시 펜으로 무언가를 쓰는 버릇이 생겼네. 스타벅스에서 얻은 작은 재생 노트에 볼펜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낮잠이 온다거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할 때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네. 지난 주 서울에 올라갔을 때에도 이 녀석들이 좋은 벗이 되어주었지. 만약 이 녀석들이 없었더라면 지난 일요일 내가 느꼈던 그리고 종래에 깨닫게 되었던 그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어떻게 끼어 맞춰야할지 고민했을 거야.

날씨가 추워지네. 해야할 일들이 점점 어깨를 무겁게 만들고 있네. 스스로 쌓아올리는 짐이기에 어디에도 군소리를 늘어놀 수 없어 자네에게만 풀어놓네. 아! 내가 봐도 어이가 없네. 어째 사내라는 짐승은 이런 것인지. 잠시 고개를 돌려 텔레비젼을 봤는데 로빠 겐조의 향수 선전이 나오고 있었네. 뒤돌아서 있던 여자 모델이 되돌아서자 순간 딱 침이 넘어갔네. 잘빠진 팔과 언뜻 드러난 쇄골, 그리고 부드럽게 자리잡은 가슴선을 보자마자 마구 가슴이 뛰는군. 감성에 쳐놓은 이성이란 덧창을 완전 열어놓은 편안한 상황에서 당한 기습인지라 당황스럽군.

갑자기 막내 누이가 좋아하는 드가의 밀랍 조상이 떠오르네. 저 모델의 조상을 떠서 하얀 유약을 덧입히고 그 위에 저 의상을 걸쳐 놓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잠시 생각해 보았네. 또 다른 생각도 드느군. 아름다움에, 매력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이 우리네 사내들의 진짜 본성이라면 여인네들의 비난은 아주 합당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야.

메디아가 생각나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비록 우리 나라에서는 힘들겠지만 말이야. 꼭 메디아를 극본이 아닌 진짜 연극으로 보고싶어. 창작된지 2천4백년이 지났음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그 신비함에 그 정도 값어치는 있다고 판단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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