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지도

탕헤르 소토, 그리고 코이
이번만큼은 완벽하게 레베르떼씨에게 당한 기분이다. 소설 한 권을 읽는데 4개월이란 그토록 긴 시간을 보낸 것도 처음이고 한 여자의 죽음이 보기 싫어 책장을 열지 못한 것 역시 처음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갈대] 이후 소설 속 인물에게 빠져드는 일은 다신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탕헤르 소토와 코이에게 완벽하게 빠져버린 것 같다.

사실 소설의 첫장에서 탕헤르 소토는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주근깨와 금발로 묘사되는 그 외양 묘사에 매력을 느낄 리 전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코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 작은 선원이라니. 온몸이 주근깨로 덮힌 여자와 키작은 남자.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어딘지 어색한 모양새 아닌가?

하지만 오래지 않아 코이에 대한 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 눈길에, 바다를 그리워 하는 그 마음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코이를 잘못된 좌표로 인도하는 탕헤르에게 ‘망할년”이란 욕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진한 바다 사나이를 잡아먹는 현대판 세이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1/3을 넘겼을 때부터 간사한 나의 마음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저 여자가 찾는 것이 정말 뭘까?” 하는 의문이 생겨 났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침몰한 난파선을 찾는다고 해서 저 여자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저 여자는 무엇을 저렇게 찾으려 하는 것이지? 꿈인가? 죽음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찾는다는 그 만족감 자체인가?

침몰된 난파선이 글로리아호에 대한 묘사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애완견의 죽음이 겹치면서 그리고 수없이 변해가는 자오선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면서 직관적으로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녀가 글로리아호를 찾던지 못찾던지 그녀는 죽게 되겠군. 소설의 시점상 코이는 살아남을테고. 왜 그녀는 죽어야만 할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을 찾고 죽으라고.

Who is He?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의문점은 세가지로 압축된다. 글로리아호가 품고 사라진 비밀을 찾을 수 있을까? 탕헤르와 코이는 관계를 가질까? 그리고 이 이야기에 숨어서 결코 드러나지 않는 빌어먹을 녀석은 언제쯤에나 정체를 드러낼까?

쥐스킨트의 로시나가 누구와 잤는가에 대한 문제를 읽을 뒤로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진도에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키 작은 남자와 주근깨 많은 여자의 관계는 의외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도도한 여자가, 태고의 여자들이 지닌 모든 악마같은 단호함을 모두 지닌 저 여자가 어떻게 반응할까?

다시 그 빌어먹을 녀석으로 돌아가자. 사실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코이에게만 적용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코이의 생각과 코이의 눈으로 보이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만큼은 완벽하게 작용하는. 하지만 그런 시점이 존재할리 만무하지 않는가? 결국 그 숨겨진 이야기의 진짜 화자를 찾아 한참이나 고심했다.

이 빌어먹을 녀석은 뭐하는 작자일까? 뭐하는 작자이기에 끝이 가까워 질때까지 냄새도 피우지 않는 것일까? 사실 이 부분만큼은 실망이다. 무언가 대단한 비밀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착각했던 화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국 코이가 바다로 되돌아 갔는지 아니면 한평생 육지에서 좌초된 인생을 보냈는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어딘가 마무리가 덜 된 느낌은 아마 코이가 화자에게 탕헤르와 글로리아호의 모든 숨겨진 이야기를 말한 동기를 추측조차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악마의 눈물, 에메럴드
글로리아호와 함께 바다가 삼켜버린 보물은 바로 악마의 눈물이라 불리는 에메럴드 원석이다. 탕헤르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그렇게 찾기를 염원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고, 결국에는 그녀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것도 이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눈물이 과연 목숨과도 바꿀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것을 위해서 그녀가 감수해야하는 스릴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악마의 눈물에 담겨진 상징적 의미를 모르겠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홀리는 것인지. 그 안에 담긴 것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워낙 보석에는 관심이 없는 소탈한 성격이라 그런 것인지도…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위와 같다. 이유를 모르니,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노라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이었더라면 바다로 갔으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나 역시 탕헤르 그녀가 당신이 필요하다 말했더라면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한이 있더라도 바다로 갔을 테니 말이다. 설령 죽음을 맞이 하더라도. 그리고 그녀가 코이에게 지불한 그 대가 역시 너무나 매혹적이다. 나 역시 거부하지 못했으리라. 배신당하고 버림받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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