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 하며!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듣고 있다. 성그레고리의 기도라는 곡인데 낮게 깔리는 오르간 소리와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소리는 항상 정신을 깨어있게 만든다. 한해의 마지막날 모든 술자리를 뒤로 한채 책상에 앉아 있다. 머리속 한편에서는 올해 끝내겠다 마음먹고 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내년에 반드시 끝내야하는 일들을 생각하고 있다. 오른팔이 아프다. 상박의 근육들이 오늘따라 왜 이리 아우성을 치는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 나에게 매우 어려운 숙제 하나가 전달되었다. 족히 몇천권은 될직한 내 도서목록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난데없이 전달되었다. 거부할 수 있는 숙제였더라면 끝가지 거부했으리라.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숙제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내가 잘알고 있기에 결국 희망조차 들어있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리옹의 산탄난사자인 조제프 푸세와 희대의 야심가이자 모리배로 불리는 카이사르, 그리고 가장 고귀하고 맑은 영혼을 지녔기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슈페판 츠바이크를 꼽는다. 만약 이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들이 선택했을 행동이 머리속을 떠다닌다. 하지만 난 이들을 존경하긴 하지만 결코 이들과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기에 조금 어렵다. 아니 매우 어렵다. 그냥 내년으로 확 넘겨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비겁하긴 하지만. 비겁함 따위에 연연할 내가 아니지 않던가?

커피가 매우 맛있다. 올해 마신 최고의 맛은 아니지만 지난 5개월동안 마신 커피중 제일 맛있다. 원래 커피는 막 갈았을 때가 제일 맛있는 법인 것을 어째서 난 바닥을 보이는 시점에서야 혀끝에 가장 맛있게 걸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커피도 떨어졌고, 홍차도 떨어졌다. 조만간 서울로 나들이를 떠나 책이랑, 차랑, 음악이랑, 모두 보충해와야겠다.

23살이 이제 2시간 40분 남았다. 23살의 한해는 어떤 시기보다 심적으로는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고, 행복과 불행이 넘나드는 불안정한 한 해였지만 다 지나버린 한 해를 비난하거나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지나가버린 한 해를 비난해 봤자 남는 것은 스스로 멍청함에 대한 반증뿐일테니 말이다.

곧있으면 24살이 된다. 24살에는 나를 채우는 것들로 풍성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민 따위는 사절이다. 새로운 사랑에 빠져보라는 권유도 사절이다. 착하게 살라는 권유도 사절이다. 잘난척하지 말라는 권유도, 따라하지 말라는 권유도, 척하지 말라는 권유도 무조건 사절이다. 꼭 필요한 것이라면 다소 치졸하더라도 손에 넣을 것이다. 정정당당하고 신사적인 플레이는 오늘로 끝이다.

24살, 올 한해는 일단 이겨놓고 볼 참이다. 25살에는 원상 복귀할지도 모르겠지만 24살만큼은 어떤 것을 잃더라도,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일단 이겨놓고 볼 참이다. 내일 얻지 못하면 영원히 얻지 못하는 것들도 있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 모를만큼 어리숙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다들 딱 한해만 눈감고 봐줬으면 해. 25살에는 다시 반성할 줄 아는 찬익으로 돌아갈테니 24살에는 사악한 나로 살게 도와줘. 사악하지 않으면 냉정하지 않으면 나로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거든. 특히 가치가 높은 것일수록 흐물거리는 유약한 마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법이잖나.


그리고 찬익
정말 한해동안 수고 많았다. 너를 힘들게 만들었던 무거운 책임감. 잘 견뎌주었고, 희비가 교차하고 운명에 농락당할 때조차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은 버리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리고 스스로의 이름에 맹세한 것만큼은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늘 언제나 지켰잖나? 그 단 하나는 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의 문제였으니 이번 한번만큼은 그 약속을 지킬 의무 면제시켜줄께. 그럼 새해에도 잘해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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