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nna be alive!

생각해 보면 꿈같던 시간들이었다. 성우와 소담한 골목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 10살 꼬맹이들에게 가장 큰 소원은 어서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이었는데 벌써 24살이 되어버렸다. 그 옛날 같이 거닐던 거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건물은 몇채 되지 않는다. 수십년은 서 있을 것 같았던 버드나무도 몇해 전에 잘려나갔다. 시멘트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으며 어린 보폭으로는 힘겨웠던 패널 하수구는 아스팔트 밑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부잣집의 표본과도 같았던 우아한 정원집은 경매에 부쳐졌다가 끝내 헐렸으며 하루 종일 놀아도 질리지 않던 그 골목과 학교가 이제는 짧은 산책에도 지루하다.

피아노 연주와 샴푸라는 영국 팝그룹에 미쳐살았던 시기도 아득하다. 브라이언 아담스의 69년 여름을 좋아했던 것도 그래미 시상식이나 MTV뮤직어워드라고 한번 있으면 한주동안 그 이야기로 쉴새 없었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왕정문의 몽중인을 즐겨들었고 기자(장깃돌)이란 곡이 제일 좋다 떠들던 사춘기 소년들의 흔적은 희미하기만 하다. 중경삼림과 동사서독를 몇번이나 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왕정문을 임신시킨 두유는 그 시절 우리의 공적이었는데.. 94년판 신데렐라 시리즈에 미쳐 녹화까지 해서 즐겼던 내 친구들은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체스와 책에 빠져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그 시기에 꿈은 너무나 폼나는 펀드 매니저였는데(95년의 이야기다) 지금은 세상에서 절대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말만 그럴듯한 증권쟁이가 바로 펀드 매니저란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내 정신을 온전하게 훔쳐가버린 초희를 어떻게 만났을까? 처음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채널에서 만난 한국인 소녀였는데 서신을 교환하면서 첫사랑의 열병에 걸렸으며 그 질긴 열병은 22살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96년 9월 놀이터의 벤치 아래에서 꺼내보던 그 사진 속의 그녀의 이미지는 이렇게 또렷한데 그녀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는 너무 흐릿하다. 나의 생각인지 그녀의 생각인지, 나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어쩌면 그녀가 했다는 일을 내가 한 일로 착각하고 있을지 모르며, 그녀의 말을 내가 한 말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준호와 기청군. 봄 소풍이 끝난 후 버스에 앉아 도란 도란 나누던 대화가 생각난다. 15층과 1층 사이에서 벌어졌던 무수한 사건들. D&D 시리즈와 영화. 그리고 산책들. 어서 수능만 봐라 봐라. 그렇게 말하고 또 말했던 시간. 그런데 정작 수능이 다가와도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때는 스무살도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였으니 지금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잘 사용하지 않는 다음 메일의 첫번째 메일의 수신일은 1999년 12월 24일이었다. 무척이나 추웠던 그 날. 얇은 자켓 차림의 준호군이 아파트 현관에서 추위에 떨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는데 햇수로 다섯해 전 이야기이다. 재수를 끝내고 보냈던 내 메일에 감동먹었던 녀석들이 벌써 제대를 앞두고 있다. 한주에도 몇번씩 오고갔던 메일들에 담긴 이십대 초반의 초상이 나한테는 있다고. 수많은 연애 편지와 소설들. 여행기는 모두 잊어버렸지만 20살 21살 귀여운 자네들의 모습 나에게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4년동안 전화번호를 세번 바꿨다. 사적인 목적으로 오용하던 메일 계정은 4개나 폐쇄했으며 천통에 가까운 메일들을 실수 혹은 고의로 지워버렸다. 그렇게 살다보니 24살이다. 가끔은 꿈 속에서 혹은 길에서 왠지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고는 하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츠바이크 양반의 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에 나오는 그 남자의 표정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 다짐 또 다짐했던 소년은 어느 사이에 시시때때로 그런 표정을 능숙하게 지을 줄 아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보다 많은 감정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죽도록 슬픈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죽도록 하기 싫은 것. 죽어도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넓어진 감정의 폭을 마음껏 써먹을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 기회가 줄어들수록 살아있다는 그 막연한 느낌을 더 많이 갈구하게 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내가 살고 있는 하루는 지독하게 정적이고 규칙적인 하루 하루다. 아직도 숨을 쉬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생동감을 원하는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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