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청년서울상경기1

시골 청년 상경하다
서울에 도착하니 8시 반이다. 옛날이었다면 게다가 요즘같은 방학이었더라면 지금쯤 한참 자고 있을 즈음인데 근래의 난 이 시간이 출근 시간이다. 물론 오늘은 하루 휴가를 내 서울에 올라오긴 했지만 상쾌함이 반, 우울함이 반 뒤섞인 이상한 감정 덩어리가 나를 지배한다. 하지만 휴가는 휴가답게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이내 우울함을 밀어낸다. 8시 32분 플랫폼에서 내려 역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눈빛을 바꾼다. 어쩔 수 없이 구속되어야 하는 쓸모없는 일상과는 티끌만큼도 연관되지 않은 그런 사람의 눈빛으로 말이다.

사실 새로운 서울역 역사는 한국의 건축물답지 않는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천정을 높게 잡고 외벽을 유리로 만듦으로써 건축물 자체가 지닐 수 밖에 없는 공간적 폐쇄성을 말끔하게 날려버린다. 음 또 잡설이 시작되었군. 아무튼 역사를 빠져나가는 동안 좌석버스2번을 타는 방법과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서 내리는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2번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2번은 타기 위한 버스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한 버스라는 인식이 여전히 머리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처럼 ‘2번은 정말 싫은걸’하고 입속으로 발음하는 나를 보면서 지하철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 알겠지만 서울역에서 종각까지는 대략 7분 정도가 소요된다. 7분 동안 벌써 마음을 살며시 흔들리는 여자를 보았다. 제길 올해는 정말 공부만 하기로 했잖아. 너의 제일 목표는 의식 자체가 죽어버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고 두번째 목표는 행복해지는 거라고. 네가 세운 목표에 애인 만들기 같은 것은 없다고. 하지만 정말 얼굴이 예쁘다. 예쁘게 다듬어진 콧날과 긴 속눈썹, 순진한 눈매가 시선을 절로 빨아들이는군. 젠장 아무래도 시골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수염난 사내들뿐이니 예전같았으면 시선조차 가지 않았을 아름다움에 끌리는 거라고. 오늘 하루동안 돌아갈 눈동자의 바퀴수를 헤아려 보고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찬익. 너무 줏대가 없어하고 말이다.

종각 영풍문고에 들어섰을 때 한마디로 놀랬다. 교통의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종로 영풍문고를 외면하던 이유가 바로 안정감과 거리가 먼 서가 배치와 시장같은 난잡함으로 무장한 분류 시스템이었는데 갑자기 전혀 딴 서점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데 예전의 영풍문고는 편두통을 유발하는 이상한 분위기의 정신 클리닉을 연상시켰다면 마호가니 색상의 서가는 차분함을 안겨다 준다. 솔직하게 아직 강남 교보에 비하자면 엉성하긴 하지만…

나를 위한 커피

하지만 영풍문고 지하에 생긴 스타벅스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런대로 싸고 편리하게 음반을 구입할 수 있던 음반숍이 작아진 것이 조금 불만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9시 01분 스타벅스에 들어섰을 때 난 이 가게의 첫손님이 되었다. 오늘의 커피를 주문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글라인더에 커피를 갈고, 드롭 머신에 집어 넣었다. 3분후 여지껏 내가 먹어본 스타벅스 커피가운데 가장 맛있는 하우스 블렌드가 뽑혀져 나왔다. 커피는 추출한지 20분 이내라는 설명이 이렇게 혀끝에 와닿는구나 하고 잠시 헤프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맛좋은 커피임에도 조금 많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12온스짜리 그란데 사이즈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는데 아무리 마셔도 12온스짜리 컵은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근래들어6온스 짜리 커피잔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다. 이른 아침 신문과 커피(혹은 홍차)로 시작되던 내 아침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걸까?

12온스는 템블러가 없는 이상 결코 누릴 수 없는 사치라는 초희의 말이 떠오른다. 그때 초희가 산 12온스 짜리 시저 템블러에 놀라던 내가 되려 부끄럽다. 당시의 난 6온스와 12온스가 지니는 여유의 차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생활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게으른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넌 그 당시에도 그렇게 바뻤는데 말이야. 난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 주제에 무엇이 그렇게 여유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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