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청년서울상경기2

가장 중요한 미션
가끔은 기억력이란 흉험한 무기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방대한 기억은 가장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친철을 베풀어 사람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 영풍문고에서 나와 덕수초등학교 근처로 일을 보러 가던 순간이 그랬다. 영풍문고와 광화문 우체국 사이의 길은 그만큼 많은 기억들이 모아져 있는 길이기에 그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억에 가슴이, 마음이 휘청거린다.

SK빌딩의 아케이트를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 위에 과거의 기억이 겹쳐진다. 기억이란 놀라운 마물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모습과 그 사이에 이어지는 대화를 영화처럼 재생해 준다. 그리고 그 기억이 재생하는 한 편의 쇼를 보는 내 가슴은 이상한 멍울로 가득찬다. 바로 이런 감정이야말로 내가 그렇게 증오하고, 자기 부정을 통해서라도 없애버리고 싶은 그것이라고 되뇌어 본다.

가장 중요한 미션은 숙련도에 알맞은 속도로 끝났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음에도 3분만에 모든 작성을 마치고 여유롭게 검토하는 나를 보면서 희미한 만족감의 웃음을 지었다. 역시 경험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한번과 두번의 차이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보니 평안할 따름이라고. 그렇게 되뇌어 본다.

갑자기 일년 전 똑같은 날이 떠올랐다. 시간은 지금이 더 이르지만 날씨나 모든 것은 똑같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순간 난 내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에 도착했노라고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난 그 때 바보처럼 그 한 마디를 외면해 버렸을까?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내 삶이 자유로졌노라고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좋아했던 것일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보다 모든 것이 나빠졌는데 말이다.

입구를 벗어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는 나를 발견했다. 혹시 다시 한번 같은 우연히 반복된다면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할지 모른다고, 그 한 마디를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쳤을 때 네가 느꼈을 허탈함. 이제는 나 역시 모르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나라면 네 한마디에 되려 내가 무릎을 꿇고 간청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일년전의 나는 너로 부터 몇년만에 자유를 얻었다는 것밖에 볼 수 없었던 멍청이었노라고 용서를 빌었을텐데…

광화문 지하보도를 접어들면서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에 손이 갔다. 이 장면 너무 익숙하지 않아. 일년 전에도 그랬다고. 광화문 약속을 학교로 옮기면서까지 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윈했다고. 그런데 지금은 조금씩 후회하고 있잖아. 후회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난 뭘까? 정말 후회하고는 있는 거니?

일년 전 같은 날의 기억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사소한 문자 메세지까지 포함한 완벽한 형태로 말이다. 다리가 풀렸다. 주저않고 싶을 정도로. 기억에 허물어지는 수치를 또 다시 당하기는 싫었다. 일년 전 그날 착시로 인해 청구역에서 선로에 떨어지려던 순간 엉킨 스텝때문에 살았다는 것까지 생각났다. 그때의 스텝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원망스러웠다.

인생은 관객 우롱극이다-광화문 교보 AM 9:30

무력하게 무너져 가던 정신을 구제해 준 것은 한 행인의 물음이었다. 파이낸스 빌딩을 묻는 행인에게 건성으로 대답을 해주고 나자 한순간 썰물처럼 기억이 빠져나갔다. 내가 서있는 곳은 광화문로 아래의 허름하고 낡은 지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나에게는 뒤돌아 볼 여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몸에 새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핫트랙에 갔다. 에이브릴 라빈의 렛 고와 러브 엑츌얼리의 OST, 그리고 콘의 신보를 샀다. 그리고 파베르 카스텔의 펜을 구경했다. 원목으로 둘러쌓인 저 볼펜과 사프의 그립감을 상상하면서도 잠시 그 가격에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수집벽이 있는 나라지만 볼펜 하나에 55000원은 현재의 내 경제 수준으로는 분명한 사치다. 그러니 알레흐르트 뒤러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나온 까스텔의 다크 바이올렛 색연필로 만족하라고. 현재 내 수준에는 그 이상은 사치니까.

르느와르의 화집을 고르러 갔다가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해외 서적관의 아트 섹션, 그 옆에는 크래프트 섹션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매우 아름다운 아낙을 보았기 때문이다. 경망스럽게도 난 조금씩 걸음을 옮겨 아낙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 황홀했다. 보이쉬한 스타일로 꾸미고 있었는데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이 장갑을 낀 손으로도 전해져 왔다.

한 시간전 지하철에서 잠시 눈을 빼앗긴 아낙은 겨우 위밍업에 불과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궁벽한 시골에서의 삶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터라 작은 아름다움에도 미치도록 황홀하다. 춘향 옆을 지키는 향단이처럼 우악스런 자세로 내 시선을 가로막은 그녀의 친구때문에 괴롭지만 만약 그 향단이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향단씨에게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우롱당한 기분이다. 삶으로부터, 무엇보다도 자신으로부터, 관객을 기만하는 배우처럼 난 하루 하루를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아무리 아름다움에 약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15분 전에는 과거의 기억에 괴로워 다리까지 풀렸던 인간이 15분 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진지하게 놀라버린다. 내가 원하는 삶은 초연하고 일관성 있는 삶인데 과연 얼마나 이런 삶을 살 수 있을지 아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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