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청년서울상경기3

여의도 am 11:10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지하철로는 십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저런 딴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초과되고 말았다. 롤러코스터의 원더우먼을 흥얼거리며 걷는 내 꼬락서니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웃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표정 관리 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음악이 아니라면 주름진 이마, 패인 뺨을 지닌 사내로 지선군을 만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억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것 같다. 너무나 많은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내가 정말 싫다. 다른 기억따위는 필요에 따라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정신 구조를 지녔으면서도 유독 이 기억에만 약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할지 모르겠다. 다만 될 수 있으면 가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할뿐.

20살 기청군과 여의도 증권거래소 골목을 걸었을 때 지녔던 느낌은 어서 졸업해서 나 역시 이곳에서, 이런 차림으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24살을 먹은 지금의 난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샐러리맨만은 정말 싫다고, 이왕이면 나만의 일, 내 사업을 해보고 싶노라고. 겉보기에는 근사해 보이지만 이곳 증권맨들의 꿈은 이곳에서 벗어나 넉넉한 은퇴 생활을 즐기는 것이나 아니면 광화문에 위치한 외국계 회사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청바지 차림의 인턴들도 보인다. 세미 정장 차림의 여자들과 버버리 차림의 검정 남자들. 그들이 이곳에서 진정 찾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몰랐던 냉혹한 통계치가 떠오른다. 어쩌면 나역시 그런 냉혹한 통계치의 bad side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조감 섞인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갑자기 번스타인과 고든, 챈슬러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내 스물을 울린 책은 없지만 스물 한살을 울린 책은 이렇게나 많지 않던가?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나 역시 이곳에서의 삶을 가장 멋지고 낙관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단지 하나의 징검다리가 아닌 종착역으로 생각하며…

서울 증권 am 11:38

30분까지 나오겠다던 지선군은 오늘도 늦다.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녀석은 조금 빨리 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30분과 38분 사이 단 8분의 기다림이었지만 한껏 회복시켜 놓았던 표정을 넝마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런 엇갈림과 조우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절대 기억조차 나지 않던 사람이 어째서 우연이란 빙자 아래 삶에 이리 멋대로 끼어드는지 모르겠다.

어색한 대화가 오고 갔다. 녀석에게 부끄러움을 느낄만한 이름 석자는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현재의 자신이 초라했다. 어쩌면 자격지심이 아니라 녀석에게 진 죄값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지선군 어서 나와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다. 이 어색한 상황에서 나를 제발 구해달라고. 처음으로 예전에 내가 지녔다 믿었던 당당함이 비겁한 마음으로 변해 있음을 깨달았다. 기분이 나쁘다. 무언가 부셔버리고 싶은 기분에 주먹을 감싸 쥔다. 그리고 애꿎은 가로수를 흔들어 본다.

11시 43분 이십대 중반의 지선군이 나왔다. 처음 본 지선군은 정말 고등학생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린 모습이었는데 이제 제법 어른티가 난다. 아니다 어른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맞다. 어쩌면 겉모습만 나이를 먹은 나보다 더 어른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5분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가시거리에서 벗어나자마자 예의 우리가 알던 그 지선군으로 돌아온다.

스파게티아 pm 11:53

“갑갑해 주겠어. 청바지 입고 출근하면 안되나.” “옷 예쁜데…” “응 엄마가 나 인턴 한다고 사주셨지” 사실 ‘엄마’란 단어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아는 사내 녀석들은 하나같이 노친네 기질을 다분한지라 집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밖에서는 “어머니”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은 스물 넷 처자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겨우 스물(?)을 넘을까 말까 한 지선의 입에서 나오는 “엄마”는 이유없이 기분을 유쾌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이유 모를 유쾌함 이야말로 녀석의 행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나처럼 이유 모를 갑갑함을 안겨다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 인생이니 말이다.

사실 시정군도 같이 점심을 하기로 했는데 일에 파묻혀 빠져 나오질 못한다. 워낙 경황 중에 잡은 약속이라 그럴지 모르겠다는 예상을 했지만 조금은 아쉬웠다. 내가 생각해도 매우 나쁜 취미지만 일에 지친 녀석이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면 커피가 배는 맛있게 느껴진다. 뭐랄까? 컵을 손바닥으로 감아쥐고 그 온기를 느끼는 폼이 그런 그립만으로도 피곤이 풀어지는지 따라 해보고 싶어진다.

시정이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과 스파케티를 말은 왼손에 힘이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봄에만 오는 증상이 너무 때이르게 왔나보다. 이틀은 아무일도 하지 않고 숙면을 취해야 겨우 일어나 돌아다닐 수 있겠지. 아직 코피는 나지 않지만 며칠 안에 아침마다 세면대를 물들이던 코피가 다시 일상이 되겠지. 하지만 그래도 작년보다는 한결 낫다. 작년 왼팔이 거의 마비될 정도로 아팠을 때 일주일동안이나 오른손을 썼음에도 아무도 몰랐는데 이제는 한끼만 오른손으로 먹어도 이상을 눈치챌 가족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지선군의 눈이 속으로 생각하기로 변한다. 사실 아주 조금 불안하다. 지금껏 속으로 생각하는 지선의 눈을 목격하고 나면 무언가 일이 생기곤 했다는 경험의 축적이 몸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제발 아무일 아니기를.

그런데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이 걸작이다. “네 블로그는 너무 우울해”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이야말로 스스로를 설명하는 색이지 않는가. 우울함에 한껏 침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망칠 온갖 것들로부터 일신을 보호하는 수단이지 않던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원철군의 말에 따르면 우울함은 창조력을 이끌어내는 기폭제라니 나를 믿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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