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퇴근 후 길을 걷고 있었다. 느릿하게 무릎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걸음 걸이로. 사실 집에서 시청까지의 2.2킬로미터의 거리 정도는 속보로 25분안에 걸어 갈 수 있다. 하지만 아침이라면 모를까 퇴청하는 길에는 늘 느릿한 걸음을 선호한다.

길을 걸으면서 하룻동안 있었던 기억을 하나씩 지워버린다. 집에 돌아온 이상. 밖에서 있었던 일을 집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자는 원칙을 지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던 옛날이라면 하루의 기억 뭉치를 끌고 들어가 느긋하게 생각해 보겠지만 가족이 있는 집에서 그런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다. 얼굴에 그리워진 작은 그늘로도 마음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삶이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 역시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을 낼 수 있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화내지 않는다고 해서.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의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고 왜 뒷통수를 내리치고 싶은 욕구가 없겠는가? 욕하고 싶은 욕구가. 파괴하고 싶은 욕구가 없겠는가?

혼란이란 무엇일까? 혼란의 시작은 의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살면서 단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보편적 인식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낳는다. 그리고 종래에는 지금껏 믿어왔던 보편적 인식이 어쩌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리고 종래에는 자신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요즘들어 나 역시 이런 혼란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불과 몇달 전이었더라면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을 살아가는 방법이 이곳에서는 이질적이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방식. 내가 수용하고 거부하는 방식. 내가 지니고 있는 자부심. 그 모든 것이 이곳에서는 너무나 낯설게 보인다.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이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란 인간 자체가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의 내 모습이 싫지 않다. 이렇게 키워지고 자라나고 생각하는 것에 단 한순간도 후회해본적이 없다. 재미는 없어 보이지만 남들 눈에 비치는 모습이 따분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내가 좋은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사랑받지는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삶이 싫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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