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청년서울상경기5

커피빈 그리고 서울역까지 걸어가는 길 pm09:30
어느 사이엔가 지선군이 취해버렸다. 난 취기도 올라오지 않는데 취해버리다니 나쁜 녀석이라 중얼거린다. 평소답지 않게 매우 귀엽게 취한 녀석을 속여 커피빈에 데려간다. 매우 졸려하는 녀석에게 쓴 커피를 먹여 잠을 깨우는 것은 고문일까? 아니면 친구의 우정일까? 가늠은 안되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오늘은 녀석을 데려다 주지 못하고 그냥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선군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중이다.

차 시간까지 1시간 남짓 남았다. 그 시간안에 지선군을 바래다 주고 기차를 탄다는 것은 솔직하게 무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은 이른 새벽부터 광화문 커피빈에서 서울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그것도 꼭 밤에 걷기로 마음 먹은 날이다. 별것 아닌 걸음이 때로는 매우 중요한 계기로 발전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싶지만 나조차 설득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으로 지선군을 설득하기란 요령부득이다.

아무튼 녀석과 술을 먹은 이래 처음으로 무정하게 녀석을 버렸다. 택시에 태워 보내기는 했지만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시위까지 벌이는 녀석을 버린 적은 처음이라 적잖이 걱정된다. 하지만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정말 산책이 필요했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말이야. 내 속은 지금 사람 속이 아니라구. 두 눈 똑바로 뜨고 내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걸어야해. 지선군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야.

거리를 걷는다. 우체국을 지나 파이낸스 빌딩을 지나 시청을 향한다. 정동 스타식스를 지나고 삼성생명을 지나 한참 개관을 준비중인 로댕 갤러리를 지난다. 손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스민 피닉스 드래곤 펄이 들려있다. 자스민차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다. 노란 나트륨등 사이로 걸음 하나가 빛난다. 숨을 쉴때마다 자스민향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다. 유쾌한 경험이다. 내 걸음이 내 커다란 보폭이 사랑스럽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룩해야 하는 목표가 보이고 스스로에게 부족한 것들. 그리고 채워 넣어야할 영역이 보인다. 그리고 지워야하는 상흔들을 인식한다. 앞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 혹여 그럴 정도로 힘들다면 말이야. 오늘을 생각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생각하고 지금 내가 생각했던, 그리고 그렸던 미래를 생각하자.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는다면 거울로 내 눈을 보자. 다른 사람의 눈부처에 가슴 졸이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 하자구.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가슴 속의 작은 울림이 들려왔다. 그래 이번만은 허락해주지. 그런데 만약 받지 않는다면 그 다음의 규칙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거야. 공중 전화를 찾아 번호를 눌렸다. 받지 않는다. 받지 않는다. 아쉽지만 규칙은 규칙이다. 그리고 기억에 작은 조정을 가했다. 이젠 모든 기억에서 목소리 대신에 자막이 뜬다. 어찌 보면 한층 재밌는 기억이 되어버렸지만 자막만 흘러나오는 기억은 무의미한 산문일 뿐이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다시 서울역 pm10:15

옆자리에서는 경주 여자와 천안 여자의 대화가 한참 진행중이다. 아이포드의 최대 볼륨을 뚫고 들어오는 대화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자기 동네 자랑인데 예의에 벗어난 저 소란스러움이 왠지 싫지 않다. 갑자기 대화가 자기 동네 출신 영화 배우로 비약중이다. 나로서는 도통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지만 재밌어 보인다.

러브 액츄얼리의 INTRO과 FINE 부분에 나타났던 분위기를 찾아보려고 20분 동안 사람들을 관찰했다. 포옹하는 사람들을 딱 넷 보았다. 역시 지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포옹하는 사람들을 찾아 20분 동안의 관찰을 실시할만큼 포옹에 굶주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 20살 무렵에는 이 자세가 무척이나 익숙했었다. 대합실이나 기차 안에서 바쁘게 펜을 놀리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노트북이 삶에 난입한 이후로는 이 자세가 가져다 주는 자유로움을 까먹어 버린 것 같다. 어쩌면 기묘하다 못해 괴기스러움이 묻어나던 홈페이지를 잃어버린 것도 내가 이 자세를 잊어버리는데 큰 공헌을 했으리라.

아무튼 투명 유리로 된 벽으로 수십량의 기차가 즐비하게 보인다. 철골과 유리로 이루어진 역사를 보고 있노라니 파리만국박람회 당시의 스케치가 생각난다. 어쩌면 그때 사람들이 느꼈던 감상을 지금 내가 느끼지 않을까하고. 수십 미터는 될만한 높이의 천정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개표가 시작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파리 북역처럼 보이는 넓직한 플랫폼이 나타나리라. 왠지 모르게 아이처럼 모든 것이 신기하다. 신기해.

오랜만에 파니펑크의 OST를 듣고 있다. 그런데 왠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에 무언가 사건이 발생해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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