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그런데 이룬 것은 없는 일상 그리고 체스

토요일 퇴근한 이래 현관을 벗어난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은 궁벽한 시골이라 다닐 곳도 없을 뿐더러 친구들 대부분은 MSN 메신저와 핸드폰 덕분으로 언제든지 별다른 어려움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은둔은 까닭없이 마냥 길어지고 있는 것 같다.

휴학을 하고 내려온 이래 내 삶은 흔들림없는 굳건한 일상으로 축약된다. 훈련소에 가기전까지 3개월은 덧없는 운명과 상처에 마냥 괴로워하며 몸을 깊히 숨겼고, 훈련소를 다녀온 이래 3개월은 비워진 머리를 채우니라, 시험공부에 마냥 바쁘기만 하다.

3개월 동안 대략 3000페이지의 텍스트를 본 것 같은데 하루에 겨우 30페이지 분량밖에 안된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라면, 재미난 소설이었더라면 하루에 10분만 투자해도 볼 수 있는 양이다. 왠지 맥이 빠진다. 텍스트는 어려운 법이라 하루에 30페이지라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라 위안을 해보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분량이다.

책장을 바라본다. 텍스트를 뺀 6칸에 채원진 책들은 대략 9만 페이지에 이른다. 대략 2년동안 읽는 책들이니 하루에 130페이지를 읽었다는 소리인데 여기에 기사 작성을 위해서 읽은 책과 잡지를 합하면 하루에 대략 250페이지쯤을 읽었던 것 같다. 독해 능력과 지닌바 밑천인 정신력으로 볼 때 채 3시간 분량이 되지 않는다. 흘러간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 난 무엇을 하며 보낸 것일까? 내가 해놓은 것들은 왜 이리 적은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봄비라 그런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빗소리가 상쾌했다. 이런 비때문에 우울할 사람이 잠시 생각났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내었다. 중요한 것은 나이니까. 하루종일 내리는 비로 내가 만족스럽다는 것만. 싱그러운 비냄새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만 기억하자. 그렇게 하루가 흐르도록 기도하자.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홍차를 마시며 몇달동안 방치했던 핸드폰를 정리했다. 봄 분위기가 나는 테마를 골라 넣고 벨소리도 바꿨다. 정리를 하지 않아 엉망이 된 전화번호부도 조정했고 그룹도 상황에 맞게 재조정했다. 그런데 휴대폰을 조작하다 보니 내가 모르는 기능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메뉴 색상도 지정이 되었잖아? 늘 빨강색은 없다고 투털거렸었는데. 모르는 것이 죄인거야 하고 중얼거려본다. 그리고 몇달 동안 쌓인 쓸모없는 만남의 축적물들을 과감하게 정리한다.

메일을 정리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계세요란 제목이 달린 메일을 발견했다. 별볼일 없는 스팸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에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분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너 지금 사랑하는 사람 있니? 아무래도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내 소원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이 알고 잘 다듬어진 사람이 되는 것이거든. 그리고 이젠 사랑이란 단어에 현혹되고 싶지 않아. 뭐랄까? 이제는 정말 지겨워.

가끔 외롭다는 생각이 들면 멋진 소설을 읽고 사랑보다 더 달콤한 음악을 들을래. 산책을 하며 시나 외우고…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않을까? 불확실성에 나를 맡긴다는 것. 그것도 송두리채 나를 맡긴다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사치인 것 같아. 설령 사치가 아니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평생 할 수 없는 일들이 많거든. 사람은 지겹도록 좋아해봤으니 몇년쯤 지독하게 싫어한다 하더라도 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참 근래들어 엣 취미 하나를 다시 되살리고 있는 중이다. 바닥까지 떨어진 체스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연습중인데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17살 이후에는 제대로 된 실력을 지닌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고 체스란 치열한 백병전이 아닌 행마술과 콤비네이션을 선보이는 기예로 변해 있었다. 몇년 동안 늘 쉬운 상대에게 맞춰 실력을 깍아먹는 동안 냉정한 계산법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체스는 바둑이 아니다. 체스에서 완벽한 승리란 없다. 상대의 피스를 전투장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온갖 책략을 동원해야 한다. 전선을 복잡하게 산개해 놓고 전열과 콤비네이션의 오묘함으로 승부를 내는 선량한 논검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상대의 전열을 끊고 움직임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현재 나의 rating은 백을 잡고 1300수준이다. 흑을 잡고는 대략 1200수준. 과거 2100을 호가하던 실력을 반토막 난 정도가 아니라 1/10 토막이 났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오랫동안 추억을 되살리는 물건이라는 이유로 취미가 아닌 어떤 환상으로 인식해왔던 체스가 다시 내 삶의 취미이자 즐거운 유희로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평생에 걸쳐 나를 즐겁게 만들어줄 애인보다 더 싱그러운 취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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