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올 듯. 그런데 우산이 없다

두 사람을 위해
지난달 친구가 묻더군. 네가 지금의 내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고.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는데 답을 모르겠어. 내가 항상 의도적으로 네 이름을 숨기는 이유도 모르겠고. 내 입으로 네 이름을 말하고 나면 깊은 망각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구나.

신은 항상 인간을 잔인하게 유린하는 방법에 매우 정통하다고 했던 말 기억나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5월의 어느 날이 생각났는데 바로 그 다음날 너를 보게 되더군. 멀리서 보아도, 뒷모습만으로도 사람을 구분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신이 인간을 유린하기 위해 준비한 하나의 덫이란 생각을 잠시 했어. 그리고 때로는 아주 조금 시공을 어긋나게 만듦으로써 더욱 잔인하게 감정을 유린하기도 하는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

한 사람을 위해
그때 난 내용물이나 포장이나 하나같이 엉망이지만 긴 생머리에서 흘러나온는 향만큼은 좋구나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혹시 내 기억속에 담겨진 추억들도 이렇게 생산된 공업 생산품으로 채워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 어쩌면 내가 너의 것, 혹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향기가 혹 인공적으로 언제든지 복원가능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왠지 추억이 더렵혀지는 기분이 들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지나가더군. 수백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단지 뒷모습만으로 너를 찾아내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조금 더 빨리 왔다면 혹은 네가 조금 느리게 갔다면 반년만에 너를 만나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되려 이런 어긋남으로 나를 놀려대는 신이 미웠어. 가끔은 대부분 이런 어긋남을 나 혼자만 인식하는 것이 싫어. 그런 인식이 나에게 주는 고통을 그 누구하고 나눌 수 없거든.

갑자기 왜 네 생각이 났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어. 어쩌면 반작용이 아닐까, 혹은 어떤 치환 작용이 일어난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사랑했던 너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추억을 보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 어쩌면 나역시 사랑받았노라고 과시하고 싶어서, 혹은 그 증거를 머리속에서나마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다시 두 사람을 위해
요즘들어 원철군과 자주 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대화할 생대가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입버릇과는 달리 몸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아. 어쩌면 말버릇과 달리 이미 체념한 것인지도 몰라. 누가 나의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너만큼 들어줄까? 그리고 맞장구 쳐주며 같이 고민해줄까? 생각의 밑바탕이 다르다면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말의 진실을 누가 이해해 줄까?

진수와 영화를 보고 홍지서림 뒷길을 산책했어. 경기전의 돌담을 지나 전동 성당에 이르는 길이었지. 전동 선당의 벤치에 아주 잠시 앉아 있었는데 왜 그 때 사진 한장 남기지 않았나 하고 자책하고 있었어. 첩탑에 연결된 피뢰침을 관찰하면서 나름대로 프레임을 설정하고 그 속에 너를 집어 넣어 보았는데 빠르게 흐르는 구름탓으로 좀처럼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더군. 5분쯤 그러다가 실핏 웃어버렸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 인생인 까닭에…

그리고 나를 위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 내가 무엇을 그리워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런 감정이 되살아난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호감도 아니라는 사실이야. 질투심이라 하기에는 너무 맑고, 숭고한 헌신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야. 이런 내가 혼란스럽게 보이겠지만 이런 모순들이 융합해 만들어 낸 내 감정은 왜 이리도 지독하게 평안한 것일까?

방금 누이방에 들어갔다가 유화 냄새를 맡았어. 누이는 르느와르의 그림에 대하여 무언가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매우 인상적인 어떤 색상을 물어보는 과정에서 화구통을 열었거든. 유화 냄새를 맡으면서 갑작스런 이해가 찾아왔어. 어떤 선배가 유화 물감 냄새에 반해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말이야.

매우 단조롭고 단순한 것에 반하는 것이 인간인 것을 보면 이렇게 아이러니를 생각하고 또 잠시나마 추억에 빠져 행복해하는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닐거야. 그리고 도저히 분석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정체를 모른 척 덮어두는 것도. 그리고 더 이상 사랑한다 쓸 수 없는,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는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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