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nge Tree-Gustav Caillebotte/웃고는 싶지만…

22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소심하단 말을 매우 싫어했던 것 같다. 대범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자라다 보니 나 역시 그렇게 자라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시나브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소심하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편협함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2살 그 나이까지는 그랬다.

오늘날 누군가가 나에게 소심하다는 말을 건네면 오늘의 난 그냥 웃고 만다. 상대가 소심하다는 말에 대답을 종용하면 원래 인생이 다 그런 법이다는 진부한 대사를 읊조린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더 이상 소심하다는 말이 싫지 않다. 소심한 것도 나이고, 애써 대범한 척 하는 것도 나라는 거창한 일원원융론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대범한 나보다는 소심한 내가 더욱 행복할 것 같은 예감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리라.

21살 봄. 원철군과 성신여대의 커피전문점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안티 테제를 주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살아남아 테제 차제의 정상에 가까워 지겠노라고. 처음 가진 생각만큼은 죽어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여의치 않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모르니 말이다.

펜을 들고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적어 내려가 본다. 그런데 한참을 생각해 보아도 생각나지 않는다.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보기에는 과거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소심한 삶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내가 진짜 자신인지, 아니면 소심한 본바탕에도 불구하고 대범해지려 노력하는 내가 진짜 나인지 시간이 흐를 수록 구분은 어려워만 진다.

방황은 항상 새로운 형태로 인간을 지배한다란 말이 떠오른다. 일생동안, 어쩌면 죽어서도 계속되는 것이 방황일테지만 방황은 항상 새로운 형태로 삶에 지배한다. 어제 방황도 전혀 다른 형태의 방황으로. 가장 친한 친구조차. 심지어는 방황하는 본인조차 오늘의 방황이 어제의 방황과 같은 본질을 지닌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모른다.

17살에서 20살까지 이어졌던 긴 방황을 끝맺음하면서 다시는 내 삶에 방황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다시는 사랑을 하는 일도. 깊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일도, 고요한 마음에 파문이 이는 것도, 질투하는 일도, 심술내는 일도, 그런 모든 일들이 나에게서 떠나간 줄 알았다. 열아홉 가을. 수능을 앞두고 몇시간씩 저녁 하늘을 바라보던 그 때 그 모든 것들을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숨겨두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얼마전까지는 대화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은 허전하다. 나조차 모르는 무언가를 영원히 빼앗긴 기분이다.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보고 싶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마음과, 억울하단 생각도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조소하는 또 다른 나도 있다.

최근 반년동안 내가 희락열이라 부르는 감정에 사롭잡힌 적이 없다. 내 눈은 몽롱하지도 않으며 항상 거짓된 감정만을 담고 있다. 상황에 따라 그저 옳다고 생각되는 감정. 진짜 내 감정 따위는 전혀 소중하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스쳐가지만 어느 사람하나 주의깊게 보지 않는다. 주의깊게 보지 않으니 기억이 날리가 없다.

사랑한단 말을 하고 싶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할 사람이 정말 없다. 지금 마시고 있는 나리노 수프리모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가져다 주는 사랑할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지나간 게임을 되돌아 보면서 마시는 커피 한잔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 이상을 느끼게 해줄 존재는 평생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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