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

결국 전화를 걸었다. 지독한 우울함이 나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주말이 주는 나른함을 한껏 즐기고 있는 잠에서 취한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응 대충 지낼만 한 것 같아. 생존력 하나만큼은 너도 알잖아?”
“화창한 봄날 기분에 내가 보고 싶기라도 한거야? 오늘 오려구?”

말문이 막혔다. 대화가 필요하기에 너에게 전화했노라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절친한 지인이지 코르티잔이 아니니까.

“그냥 가긴 갈 것 같은데 선약이 있어. 선약이 끝나고 나면 너무 늦을 테고”
“반 년만에 건 전화치고는 너무 맥 빠지네. 재미없다.”
“바쁘지?”
“응..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 그리고 수업 일상이 너무 지겨워. 주말마저 없다면“
“좋아보이네.”
“당신이 좋아보이네란 말을 쓸 때 항상 난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 다 알아. 왜 그러는데?”

아직도 너한테 난 당신이구나. 까닭 없이 당신이란 호칭이 듣기 좋았다.

“그냥.. 날씨가 너무 화창하거나. 달이 너무 예쁘면 괜히 그러는 것 있잖아.”
한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아직도 포르말린향이 깊게 벤 손은 싫어?”

너무나 직설적인 질문이다. 대답이 궁색하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삶을 구속하는 규칙이 있다구.”
“그 규칙에 아직도 난 해당사항 없음이야?”
아니야. 난 그렇지 않은데 내 그림자는 항상 그렇게 말해. 인생은 99퍼센트 타이밍과 1퍼센트의 노력으로 결정되는 룰렛이라고
“아냐. 난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단지 내가 비겁해서 그런거지.”
“… 그래서 밤에 만나자구?”
“바람이 차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구. 늦은 밤 으슥한 골목길 걷는 취미도 이젠 시들해졌어.”
“그렇지. 아직은 조금 춥긴 하다. 감기도 유행이던데.”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6개월 만에 건 전화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간고사 끝날 때쯤. 갈게. 학교 앞에서 납치해줄 테니 걱정 말라구. 책상에 종이인형을 모셔두고 싶어졌는데 골라 줄꺼지?”
“응. 그래줄게.”

그래도 외로움은 조금 가신다. 돌아갈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착각에 빠진다. 착각이라도 좋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무모해지는 법이고 행동에 사리를 잊어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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