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assination of Caesar

십대 소년에게 영웅은 더없이 멋지다
1990년, 열살 꼬맹이었던 나에게 책을 아이스크림보다 더 좋아하게 만든 계기를 제공한 책은 플루타크의 영웅전이었다. 페리클레스와 케사르(당시에는 이렇게 표기되곤 했었다. 줄리어스 케사르라는 표기법으로, 영어와 그리스어가 섞인 이상한 음독법이다)는 열살 소년의 가슴을 거칠게 뛰게 만들었던 인물들이었고, 비열한 천재 스타일의 알키비아데스와 모범생 스타일의 카밀루스는 괜히 멋져 보였다. 포프리콜라의 우유 부단함도 좋았고, 필로포에멘의 진지함도 좋았다. 에파미논다스의 불운한 전사에 슬퍼했고, 테미스토클레스가 독약을 마시던 장면에서는 울었던 기억도 있다.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위대한 영웅을 꿈꾸었고, 혹은 지적인 인문학자를 꿈꾸었던 한 소년은 이제는 다른 것을 꿈꾼다. 성과 좋은 CEO들의 차이점을 분석하기 바쁘고, 증권 시장과 금융 기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무엇이 되느냐 보다는 무엇이 최선이냐고 묻는다. 꿈보다 중요한 것이 현실이라는 절대 명제에 복종한다.

‘카이사르의 죽음’과의 조우
4월의 마지막 주, 서점을 거닐다 ‘카이사르의 죽음’이란 책을 뽑아 들었다. 아직 발행일도 넘기지 않은 따끈따끈한 최신간이었다. 내용도 모른 채 카이사르란 이름에 매혹되어 계산을 치루었다.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따끈한 까페 베로나의 향을 즐기며 책장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껏 내가 믿어왔던 신념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카이사르의 죽음’의 요지는 카이사르가 포퓰리즘에 헌신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극우 보수에 비하자면 포퓰리즘이 조금 더 건전하다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해석은 WASP 같은 보수주의 신사 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왜곡된 역사란 것이다.

개인적으로 난 극우는 아니지만 적당한 보수주의자이며, 포퓰리즘이야 말로 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요소라는 의견에 공감한다. 어쩌면 19세기 영국에서 조심스럽게 개진 되었던 엘리트 정치주의에 공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대중이란 변덕스러운 괴물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수에 의한 기능성 낮은 민주정보다는 효율적이고 정직한 과두정이 인류 역사의 귀결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견해 본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죽음’은 이런 나의 믿음을 불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보수주의자인가? 회고주의자인가?
혹시 나 역시 내가 그렇게 비웃어 왔던 카시우스나 브루투스 같은 회고주의자였던 것이 아닐까? 단지 현재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회고주의자이면서 보수주의자란 가면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닐까? 혹여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완고한 회고주의자가 아닐까? 보수주의자와 회고주의자의 차이를 의식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인식하는 나로서는 회고주의자라는 비난은 중대하고 심각한 상처로 다가온다.

어쩌면 난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고, 나쁘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치명적인 장애도 없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부적격 요인은 없는 집안에서 자라났고, 무엇보다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물론 그만큼 거만하고, 냉정한 성격 머리라는 덤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내가 파리 코뮌 당시의 보수 반동에 대해서는 이상한 혐오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 박쥐 같다는 느낌도 든다. 신나치 같은 극우파를 생리적으로 혐오하면서, 적군파의 테러에 대해서도 만만치 않은 혐오감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난 단지 폭력을 혐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배우지 못한 사람, 갖지 못한 사람에 비해 조금은 우월하다는 가당치도 않은 선입견을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관철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평등하다. 하지만 사람도 평등한 걸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에 동의한다. 물론 이 동의는 자연권 측면에서의 동의이다. 자연권 측면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만 개개인의 능력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합리적인 차별과 경쟁 시스템이야 말로 인간이 군집이 아닌 사회로 남아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현재 public service로 묶여 있는 동안 스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나의 평가에 중요한 증거가 된다. 개개인의 사람들이 절제되고 이성적이며, 선량하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가정 아래 하루를 살고 있노라면 뒷통수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난 완고하고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며 비천함이란 단어에 공격적 본능을 지닌 그런 사람이 되어 가고 만다.

‘카이사르의 죽음’에 대한 반박
‘카이사르의 죽음’은 일반 역사서 수준으로는 썩 잘된 것은 아니다. 로마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저자가 들이대는 논증에 반박할 거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이 아닌 제도와 경제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로 눈으로 보자면 합리적인 관료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은 고대에 원로원이라는 과두 정체가 지배할 수 있는 통치력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6세기의 명을 보라. 레이 황의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를 보면 매우 전제적인 중국의 황권조차 매우 추상적인 운영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의 통치 기술이 비하자면 고대의 통치 기법은 정보량도 빈약했고, 통치라는 투명 겉옷만 입은 알몸의 임금님과 같았다.)

아무튼 이런 상식을 통해 판단할 때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저자가 휘두르는 극우 귀족 계급에 대한 비난은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 5천 만 명으로 추산되며 유사 이래 두 번째로 거대했던 제국을 겨우 300여명의 원로원으로 어떻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통치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통치 조직을 도입하기 위해 황제정이 등장한 것이 역사의 귀결이 아닐까?

포퓰리즘
하지만 ‘카이사르 죽음’이 주는 시사점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현대에 적용해 보면 매우 강인한 폭발력을 지닌다. 저자의 해석과 논증이 로마 공화정 후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현대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보다 현대에 더 적절한 적용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조차 포퓰리즘은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시대의 흐름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갖게 만든다.

포퓰리즘이 강화되는 현대가 매우 혼란스러우며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에 수긍을 하지만(그래서 난 실용주의자적인 관점에서 포퓰리즘을 반대한다) 혹시 현 시점이 포퓰리즘이 정착되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혼란스럽다면 (최소한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 시대와 같은 흐름이 반복된다면) 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엇인 진실인지 알지 못하는 눈먼 자가 되고 만다. 어쩌면 진짜 회고 주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십대 소년에게 역사란, 역사 속의 영웅들이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멋진 사람들이었는데 이십대 청년에게 역사는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참 세상 한번 오지게 복잡하다…)

2 thoughts on “Assassination of Caesar”

  1. 녀석. 약한 척 하다니.
    내가 알고 있는 자네는 이런 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나이였는데.
    그리고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현실에서는
    ‘절대 실현불가능’한 일이지.^^

    언젠가 독후감 멋있게 써보고 싶네.
    지금의 허접한 작문실력으로는 실망만 할 것이니…

  2. 나의 세계가 흔들린다기 보다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흔들린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
    세상과 담을 쌓고 살 수 없으니까.

    아무튼 불안한 시기이네.
    어떤 패러다임도 우세하지 않은 이런 시기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은 있어.
    불안감 마저 감출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어딘지 꺼림직한…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잖나)
    그런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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