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론에 관하여

박승 한국은행 총재의 인터뷰를 읽었다. 중앙은행의 수장으로써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감을 내보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호도했다는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방어책으로 금리를 인상시키거나 통화공급을 수축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은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이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답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 위기론이 과대 평가 됐다는 답변은 중앙 은행의 수장으로서 보이는 ‘깡’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사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지금이 몇 번째 경기 국면인지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장 긴 경기 국면 주기일지도 모르고, 일부 연구처럼 사이클의 매우 짧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활황의 예비 단계라는 루머를 액면가 그대로 믿어주기에는 이 동네에서 먹은 밥이 너무 많다. 진짜 저점을 통과했는지도 확언할 수 없는 시점에서 경기 순환론을 근거로 경기가 회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경기 선행지수도 활황을 알려주기에 부족하고, 재고지수도 마찬가지다)

경제 위기론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는 주어진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다.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표상 경제 위기로 보기 어려운 점이 분명 존재한다. 경제 성장률은 지난 분기 5.3%을 기록했고 환율은 안정되었으며, 금리도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실업률도 지표상으로는 분명하게 조금이나마 줄어 들었다. 기업의 매출순이익률은 늘어 났고, 부채비율도 역대 최저 수준이다. 차이나 쇼크와 유가 상승이라는 악재가 겹쳤지만 그래도 수출에 매우 큰 타격을 입힌 것 같지는 않다(참아낼 만한 수준의 타격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 같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지표 속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다. 지난 분기 경제 성장률은 5.3%이지만 동일 기간 내 수출 성장률은 15%대 였다. 수입 성장률을 고려해도 NX(Net Export)의 대부분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성장이 일반 국민 계정의 소비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신규 투자 선행지수는 여전히 100이하이며 기업들은 저렴한 금리와 높은 수출 성장률 덕분에 거두어 들인 순익을 부채를 줄이는 데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해석해 보면 상황은 위기에 가까운 쪽으로 저울추가 기운다.

콜금리와 시장 금리가 매우 근접한 현상황에서(심지어 콜금리의 추가적인 인하까지 논의 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이 신규 투자 대신에 부채를 줄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뜻은 신규 투자할 프로젝트가 없다는 설명이나 장기적으로 금리가 요동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시그널이다. 하지만 금리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다만 현재로서는 신용 경색의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금리가 상승하기 보다는 하락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다만 연방단기금리의 인상폭이 매우 커진다면 이 것은 우리 금융 시장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부채를 줄이고 현금 보유액을 늘리는 기업 파이낸싱 전략의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첫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필립 부틀러의 주장대로 장기적인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다. 장기적인 디플레이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경우 현재의 기업 파이낸싱 전략은 가장 효율적이다. 낮은 금리 수준과 가용 자본량이 낮은 상황에서 통화의 가치가 상승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현금을 보유함으로써 (다시 말해 현금에 투자한다는 의미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부틀러의 주장에 관해서는 그의 저서 [부의 대전환]을 참고하세요)

물론 저금리 상황에서 디플레이선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인 자본 공급에 어려움은 없으며 기업이 현금에 투자하는 유인을 과대 평가 했다는 비난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비난의 토대는 솔로우 모형이나, 개방 경제 모델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며, 거래 비용이 0이며 금리차와 리스크가 없는 경제 모델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또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에 대하여 완벽한 대응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이 불거질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장기 침체를 보라. 일본 중앙은행의 엘리트들이 돈을 찍어 낼 줄 몰라서 안 찍었겠는가?

두 번째 가능성은 금리와 경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최선의 의사 결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공산품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부동산은 약세로 돌아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채의 가치가 폭락할 확률은 매우 낮으며,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고정 자산에 투자하기 보다는 현금 같은 유동 자산에 투자하는 편이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온건한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다. 조금 쉬운 표현을 쓰자면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나 정치권에 아쉬운 소리해가며 사업하기 싫은 것이고(다시 말해 은행 대출과 로비에 학을 떼었다는 표현도 가능하겠지),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주시하고 있으며(그러니까 신규 투자를 안 하지), 여차해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확 해외로 튈 준비를 하고 있다는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그래서 고정 자산에 투자를 안 하는 거다. 유동 자산으로 들고 있어야 튀기가 쉽지.)

사실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신뢰 관계의 붕괴와 펀덤멘탈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경제는 앞날을 생각하는 장기적인 비전에 투자하기 보다는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기 급급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계와 기업 정부간의 신뢰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접어 든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자기 실현적 예언]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계 부분에서 보기에 현재의 경제 상황은 [예언]을 걱정할 판이 아니라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실제 상황]이다.

정부에 대한 기업의 신뢰감 역시 가계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정부가 투자를 독려하고 경제 단체장과 간담회를 가져도 기업 입장에서는 공수표 한 장을 떼어줄 따름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기에도 심심하면 오라 가라 부르며, 중요 정략에 대해서는 방관을 최적의 정책을 삼는 정부가 더 이상 사고 좀 안쳐줬으면 하는 바람인 모양이다.

신뢰를 주지 못하는 정부는 결국 경제의 선순환 시스템을 붕괴 시킨다. 처음에는 소소한 불신이지만 소소한 불신이 만들어낸 부정적 영향력은 순환 과정을 통해 몇 배로 중첩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경제 성장률이 올라가도 실물 경제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며, 높은 매출이익률을 내는 기업들은 투자 보다는 관망에 주력한다. 정부는 무능함으로 성토를 당하며 다시 신뢰를 상실한다. 대통령이 아무리 [자기 실현적 예언]을 경계해도 이미 서푼짜리 보다 못한 정부의 말에 기업과 가계가 납득될 리 만무하다.

수출과 금리, 환률의 삼박자가 맞아도 경제 주체간의 신뢰가 붕괴되고 성장 엔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으면 종국에는 단지 엇박자가 될 공산이 크다. 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내 기업을 붙잡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경 분리의 원칙을 세우면서도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배 논리는 여전하다. 분리는 하되 누가 힘이 센지는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겠다는 그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가계는 어떤가? 지난 6년 동안 경제의 분배 시스템은 더욱 왜곡되었고, 기존의 사회관이 붕괴 일로를 걷고 있으며, 사람들 대다수가 피부로 느끼는 경기가 최악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옳다면 옳은 것이라는 권위주의적 정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어렵지 않다. 다만 몇몇 핵심 전문가들의 머리에서 짜낸 정책 수단으로 뒤집기에는 너무 멀리 왔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역량을 집중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강력한 매력과 현혹으로 긍정적 자기 실현적 예언을 온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번 행정부는 첫번째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책임감 있지도,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멋지지도 않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길은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빌며 몇 년을 더 기다리는 것 뿐이다.[#M_ … | 느낌 혹은 단상 |

이필상 교수가 지난해부터 줄기차게 주장한 것처럼 한국 경제는 외과 환자가 아니라 내과 환자임에 틀림없다. 그것도 중환자실에 입원한 의식불명의 환자로. 외과 환자는 응급 치료술인 수술로 개선이 가능하지만 내장 기간에 문제가 생긴 내과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꾸준하게 지속적인 치료다. 내과 환자에게 충분한 영양(예를 들어 NX)이 공급 되어도 장기에 손상을 입은 환자가 이를 건강을 개선하는데 사용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사실 정부나 한은 측의 주장과 다르게 학계에서 내놓은 의견은 성장 동력이 꺼져 가고 있으며, 현재의 성장 동력을 대체할 산업의 육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5월 이후 경제 위기론이 고개를 들기 이전에 경제 관료중의 한 사람이 한국 경제를 망망대해에서 엔진이 고장 난 배에 비유 했는데 이 발언이야 말로 현 행정부의 핵심 테크노크라트가 보는 우리의 실상이 아닐까 싶다.(그런데 이필상 교수님. 학점을 너무 짜게 준다. 때때로 옆길로 새는 수업은 재밌지만 재무관리와 금융론은 나 같은 머리 나쁜 범인이 듣기에 너무 나쁜 수업이다. 너무 팍팍 뛰어 넘는다는 것이 문제… 게다가 시험 문제에서 나오는 공식 유도를 세상에서 가장 외우기 싫어하는 나로서는 대략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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