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에 대한 단상

2004년 7월 7일 ZERO에 다녀왔다. 난생 처음 가본 스탠딩 콘서트였던 게다가 점잖을 뺄 필요가 없는 첫번째 콘서트 였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본 콘서트란 늘 주변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조금은 불리한 조건의 공연이었기에…
2년동안 꼭꼭 잠궈 놓았던 마음의 빗장를 열고 가벼운 기분으로 콘서트를 즐겼던 듯 싶다. 가끔은 껍질을 벗고 마냥 즐길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껍질 속에서 질식사 할 수도 있으니까

Wake me from silence!
허리가 끊어지도록 뛰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목이 쉬도록 소리쳐 본 적이 언제였던가? 일상의 균형추를 단단하게 붙잡는 것이야 말로 [폐인]이 되지 않는 첫걸음이라 세뇌 당해온 나로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의 일이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는 몸을 관찰하는 것도, 터져버릴 듯 격렬하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느껴본 것도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살아있다]란 기분에 잠겨버린 것 역시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내장이 저릿할 정도로 강인한 [소리]의 홍수 속에서 고요함을 경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고막을 가득 채우는 [소리] 속에서 고요함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갖은 소란스러움이 일순간 꺼져 버린다. 무소음의 진공 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처럼 한 순간 외부와 내가 완벽하게 차단된다.

그리고 이내 알 수 없는 희열이 몸을 가득 채운다. 고생스러웠던 지난 몇 달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각으로 늘 복잡했던 머리가 깔끔하게 비워진다. 내일의 걱정도, 오늘 하지 못한 일도, 어제의 과오도 모두 머리 속을 떠난다. 지금 이 순간을 나를 지배하는 것은 드럼과 베이스가 토해내는 진짜 [소리]뿐이다.

In the Zero
영화나 연극, 뮤지컬을 감상하는 것과 콘서트를 즐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영화나 연극의 경우 무대와 관객의 거리가 재아무리 가까워도 관객의 이성은 무대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관객은 대사와 장면 하나 하나를 분석하고 연출가의 숨은 의도를 깨내기 위해 항상 고민하는 관객이 된다.

그러나 콘서트에서의 관객은 이성따위는 집에 내버려 두고 온지 오래다. 완고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한 나조차 음악에 몸을 내맡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부딪치는 몸들이 싫지 않다. 옆에 선 아가씨의 팔을 타고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현기증을 느낀다.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는 차갑기 그지 없었는데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초고열의 발열체로 변해 버린다. 내 팔도 만만치 않은 발열량을 자랑할 텐데. 이 아가씨에게는 애당초 게임이 되지 않는다.

긴 팔에 와 닿는 허리와 가슴의 굴곡이 더 없이 관능적이다. 몸에서 발산하는 열기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Quel comment deliceux!란 클레망소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이 얼마나 짜릿한가!] 허락 없이 이리 저리 부딪치는 육신들이 전혀 싫지 않다.(사실 신체의 특정 부위가 부딪칠 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일순 내가 치한이라도 된 기분에 휩쓸리지만 이내 이런 생각은 씻겨 내려간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다. 생각이란 것이, 훈련 받은 사고력이라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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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콘서트에 대한 단상”

  1. 과찬이십니다. 맨날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요.
    연인도 만나는 이도 없는 고립된 삶을 살다보면 여유는 알아서 생긴다는 말이죠.
    홈페이지 들려봤습니다. 고양이가 매우 인상적이더군요.
    시간 내서 찬찬히 설펴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fob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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