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ction

지난 몇 달 동안 절제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크게 웃는 일도, 크게 상심하는 일도, 힘껏 사랑하는 이도, 증오하는 이도 없는 그런 밋밋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밋밋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끝내왔으며 이런 삶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름의 한 복판에서 덜컥 발이 걸려 버렸다. 처음에는 상심한 원철군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려던 의도였는데 이내 망각 혹은 절제라는 상자 속에 넣어 놓은 기억들이 부상해 버렸다. 24살. 더 이상 고민에 나를 맡기는 우(遇)를 범해서는 안 되는 나이인데 어째 잘 안 된다. 고통스럽다거나 괴로운 마음이라 부르기에는 태연한데 담담한 마음이라 부르기에는 확실히 거칠다. 이른바 감염이다.

초기 감염 상태에서 기억은 한 몇 해 전으로 되돌아 간다. 교보문고의 철학 코너에 앉아 진수군에게 괴로워 죽겠다는 메시지를 날리는 내가 보인다. 심장이 부셔질 듯 아파하던 내가 떠오른다. 오늘의 밋밋한 심장으로는 그 격렬함을 견뎌 낼 수 없다. 잘 가라는 한마디도 없이 날카롭게 나를 외면하던 시선도 떠오른다. 뒷골의 싸늘함과 그래도 사랑했기에 미워할 수 없었던 통증이 되살아 났다. 깨진 유리 파편을 하나 하나 심장에 박아 넣는 아픔이었다. 화끈했다.

[감염의 초기 단계는 고열과 통증이 동반될 수도 있습니다]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살짝 잠이 들었다. 시간은 헤아릴 수 없는 만큼 오래 전으로 흘러 있다. 편지를 읽고 있는 내가 보인다. 익숙한 필체속에 담긴 마음이 느껴진다.

[#M_ 익숙한 필체 | 오늘따라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군 |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나를 위한 배려가 넘쳐 나는 편지였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더군요. 냉정한 문체로 써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살면서 한번쯤은 너와 내가 같은 공기로 호흡하는 날이 오겠지. 어쩌면 그런 기회가 꽤나 많을 지도 몰라. 어쩌면 같은 대학에 다닐 지도 모르고, 친구의 친구라는 사이로 테이블 앞에 마주할 지도 몰라. 더 많은 시간이 지나 우리가 완전한 어른이 되어 있을 즈음에는 정중하게 존칭으로 나를 부르겠지. 그때 누가 고통스러울까? 난 아릿한 정도겠지만 넌 나를 볼 때 마다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까? 가끔은 잘못을 인정하고 되돌아와도 괜찮아. 교차점을 지났다고 되돌아 오지 못하는 법은 없으니까.

_M#]
꽤나 오래 전에는 저 마음이 온전하게 나의 것이라 자신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없다. 거만하고 잘난 척으로 뭉친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강적이 그녀 옆에 버티고 서 있음을 아니까. 과거 혹은 꿈에서나 편안한 기분으로 그녀를 생각할 수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동안 폐인 생활에 물들어 삶을 허비했던 나를 지금도 용서 할 수 없으니까. 다시 잠에 든다. 일기장 한 켠, 두텁게 쌓인 도큐멘트 폴더에 숨어있던 기록들이 생각난다. 사진 한 장이라도 남겨둘 걸. 그랬다면 지금 덜 아팠을 텐데. 이제야 깊은 잠에 빠져든다. 정말 깊은 잠이다. 비록 잠에서 깨고 나면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F.L. 하나만을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M_ 처방전 | 죽으라는 소리나 진배 없다 |

감염의 가장 일반적인 증세는 우울증을 동반한 자학 증세입니다. 시간을 치료법이라 생각하지만 시간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죠. 뇌에 물리적 쇼크를 가하거나 기억을 지울 만큼 강렬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증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질병의 잠복성입니다. 좌절하거나, 우울하거나, 심지어 너무 만족스럽고 기쁜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이 질병은 재발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예 처음부터 감염되지 않아야 할 질병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질병입니다.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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