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vs 스타일리스트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나 역시 국적불명의 문체를 사랑했던 것 같다. 고전과 현대 소설의 경계 사이에서 잠시 방황하던 나로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스타일이 살아있는 문체가 꽤나 현대적이라 느꼈던 모양이다. 전위적 프랑스 작가들도 좋았고, 하루키 역시 그 시절에는 정말 좋았다. 도서관의 해외 소설 코너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던 수많은 쓰레기들을 읽으며 어딘지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인과 관계가 명확한 문장보다, 감각적인 문장을 즐기면서 내가 젊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환상은 상당히 일찍 깨졌던 듯 싶다. 산 송장과도 같았던 96년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봄이 왔을 때 난 더이상 감각적인 문장에 속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후로도 몇년동안이나 감각적인 문장을 흉내내는 버릇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지금도 버릇만큼은 여전하다) 감각적인 문장을 뛰어넘는 진짜 대가들의 세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던 듯 싶다. 물론 그 과정이 가슴의 멍이 지워지지 않는 고난의 시간을 전제로 하긴 했지만…

대가들이 세계는 복잡하지 않다. 스타일리스트라 불리는 작가들의 문체가 공통된 기호와 잡학이라는 두 가지 배경을 이해의 필수 요소로 삼고 있는데 비해, 대가들은 상식과 인간성이라는 쉬운 것들을 이해의 필수 요소로 삼는다. 대가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명 브랜드도, 특이한 음식 이름도, 특별한 밴드나 영화의 특정 시퀸스를 암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주어진 상황의 주인공이 되어 내 상식과 본성으로 웃고, 슬퍼하면 그만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한가지 의문만 품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훌륭한 독자가 될 수 있다.

대가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특정 단어에 숨겨진 의도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길고 지루한 시소게임을 벌일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에 감동하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대가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려는 열정이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대가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조급한 마음으로 결말에 접근하곤 했던 성마른 내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스타일리스트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30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결말을 읽고 싶어하는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힘겨워 했던 내가 말이다.

좋은 독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책장 속의 주인공이 되어 넓은 이야기 속을 거닐 여유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대가와 스타일리스트를 구분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나에게 대가로 다가왔던 작가들이 타인에게는 스타일리스트인 경우도 있었고, 지독하게 유치한 문장으로 느껴졌던 스타일리스트의 이야기가 어떤 이에게는 상황에 딱 맞는 감동의 물결이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책 읽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책을 권하는 일이다.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늘 조심해야 해] 언제 부터인가 우리 세대의 책 읽기는 이렇게 변해 버렸다. 자신만의 대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유행이란 뜻 모를 기준이 세운 작가 리스트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인다. 책을 권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만의 대가를 타인에게 소개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책을 소개하는 일은 우주 여행처럼 보기 드문 소망이 되어 버렸다. 대신 우리는 유행에 뒤쳐지기 않았음을 상대에게 알리기 위해, 감동을 공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수준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권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어느 사이엔가 나 자신도 우리 세대식의 책읽기에 포획당한 성난 짐승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7 thoughts on “대가 vs 스타일리스트”

  1. 아이작 아시모프를 읽을 때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아시모프는 어려운 이론으로 그의 책을 치장할 수도 있었고,그의 책을 충분히 전문 서적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그는 그러한 치장대신 쉬운 언어와 유머를 선택했죠.
    그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과학자이자 작가입니다 🙂

  2. 아시모프와 멀어진지는 시간이 꽤 된 듯 싶습니다.
    고등학생 시기의 여름 보충 수업시간이면
    아시모프부터 리키까지 다양한 책들이 교실을 돌아다녔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물리책을 대신하던 그 댜양한 책들 가운데
    이론으로만 채워졌던 재미없던 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공에 관련된 실용서적 읽기도 바쁘다는… ㅡㅡ;

  3. 오래간만의 트랙백이네요. 하이얌님의 대가 vs 스타일리스트 포스트 관련글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 좋은 책이구나’ 라며 책을 읽은게 무척 오래전 일 같아요. 제 독서수준이 청소년 ?

  4. 보내주신 글은 잘 받았습니다.
    의뭉스러운 저와는 달리 솔직 담백 간결한 맛이 살아 있더군요.
    소설 한권을 읽을 때마다 전에는 모르던 밴드 한둘은 꼭 알게 된다는 표현에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쓰고 싶던 말이 딱 그거였거든요.

  5. 문장이 작가가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냐 목적이냐의 차이가 대가와 스타일리스트를 구별하게 하는게 아닐까합니다. 문장에게 끌려가는 이는 읽는 이를 몽롱하게 만들어 버리지만 문장을 지휘하는 이는 상식의 틀 안에서도 모든걸 보여줄 수 있는 문장을 길러낼 수 있으니까요.

  6. 동감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문장을 지휘하는 작가들을 발견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거예요.
    제 친구는 [평생의 한 권]이란 표현을 자주쓰는데
    아마 좋은 작가를 찾기 어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결국 이런 까닭으로 초코릿처럼 정확한 맛은 모르지만
    한번 먹기 시작하면 중독되어 버리고 마는
    스타일리스트들에게 빠지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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