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시브 혹은 블로그

커피 잔을 쥐는 모습만큼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빼어남을 자랑하는 친구 하나는 해리 포터를 읽고 가장 갖고 싶었던 것으로 펜시브를 꼽는다. 필요에 따라 기억을 저장해 놓을 수 있는 이 매력적인 마법 도구에 대한 내 생각 역시 친구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해리 포터를 읽으면서 펜시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현실에서 펜시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펜시브와 비슷한 기능적 용도를 지닌 대용품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소소하게는 짧은 메모에서 일기장까지 펜시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대용품의 범위는 우리의 상상력 이상으로 넓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펜시브에 가장 근접한 대용품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블로그가 아닐까 한다.

근래 들어 블로그의 성격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듣게 되는 것 같다. 광범위한 포용주의에서부터 엄격함을 갖춘 순혈주의까지 꽤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었다. 블로그에 대한 내 의견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내 블로그는 이런 성격을 토대로 구축되었다는 암시 정도는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기백을 자랑하는 방문객을 가진 영향력 있는 블로거도 아닌 주제에 할 짓은 다한다고 비난한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M_ 나만의 해석에 따른 내 블로그란… | 이렇군. |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블로깅을 하는 이유는 30년 뒤의 나를 위해서다. 중년의 워커홀릭이 되어 세파를 넘고 있을 나에게도 추억은 있으며, 과거에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책을 읽었으며, 이런 글을 남겼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해서다. 나 역시 사랑을 했고, 절친한 친구와 행복한 삶을 누렸었다고 되새김질 하기위해서다.

시류에 민감한 주제에 포스팅 하더라도 평가 정도로 그치는 것은 모두 미래의 나를 위해서다. 지금의 내 나이만큼 시간이 흐르고 나먼 내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오늘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묘한 것이 하나 있다. 미래의 나를 즐겁게 만들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가는 블로그가 되려 오늘의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쉽게 망각하지 못하는, 꽤나 좋은 기억력을 타고 난 나에게 기억은 과거의 생채기를 일깨우는 무엇이 되곤 한다.

그런데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망각이 일어난다. 안전한 곳에 보관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형태로 보관 중이기 때문에 머리 속에 담아두는 것과 진배없다는 생각이 나를 편안한 망각의 길로 이끈다. 무언가를 편안한 마음으로 잊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블로그의 묘미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기록한다는 말에 무척이나 공감하는 나로서는 특히나…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태도는 블로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내가 포스팅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서다. 난 정보의 공유에도 무관심하고, 온라인이 주는 자유로움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기실 온라인 상의 내 삶이란 오프라인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온라인이란 오프라인상에서 할 이야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오프라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에게 익숙한 논의의 방식이란 테이블에 앉아 차 한잔과 나누는 대화다. 간결하고 명확한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위트가 무엇인지 아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더 의미 있고 맛깔스러운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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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나름대로의 해석에 달려있다. 똑같은 도구라도 나에게는 생활 용기로, 뒤샹에게는 예술로 해석되는 것처럼 블로그 역시 해석에 따라 다양한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도구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블로그는 신념이자 철학이 아니다. 블로그에 태도를 반영할 수는 있겠지만 블로그가 태도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블로그가 아니다. 도구 자체에 어떤 정의와 설명을 부여해도 사용자의 상상력과 해석에 따라 도구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망치가 생활의 연장으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흉기로 돌변하는 것처럼, 도구는 도구에 붙은 꼬릿말보다 사용자의 의지에 더 손을 탄다. 사실 블로그에 붙은 꼬릿말이 무엇이냐는 그다지 중요한 소재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꼬릿말이 붙어 있어도 사람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블로그에 대한 논쟁은 시간에 대한 논쟁을 하는 것과 똑같아 보인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균등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노하우와 태도는 모두 다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을 사용하는 자세다.

블로그에 붙은 꼬릿말이 중요하지 않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좋은 꼬릿말만으로 제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내가 시대착오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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