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Genius failed

스무 살을 울린 책이란 말이 있다. 삶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영향력을 미친 책을 말하거나,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깨침을 준 책을 통칭하는 말인데 아쉽게도 나에게 [스무 살을 울린 책]은 없다. 나의 스무 살이란 어린 시절 읽었던 수많은 책들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1살, 내 삶의 지평을 바꾼 책은 있다. 로웬스타인의 When Genius failed(천재들의 실패)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가장 큰 금융 사건은 베어링사의 파산 사건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이 사건이 준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서 당시 중학생이던 난 갖고 싶은 직업으로 Investment Banker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진정한 마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IBer의 비밀스러운 통찰력으로 만들어지는 거대한 수익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지금도 15살 무렵에 쓴 편지를 보면 각종 금융 상품과 보험 시스템에 매료된 소년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꿈도 변해서 고등학생 때는 항공기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아마 라팔의 미려함에 반해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Long-Term Capital Management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서 어린 시절 매우 큰 사건으로 느껴졌던 베어링사의 파산은 금융 업계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변동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베어링사는 단지 조금 더 불우하고, 센세이션널한 경우였을 뿐, 현대 금융이 만들어 낸 진짜 영향력 있는 사건은 풍문의 여신 파마로부터 비밀스럽게 보호받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 것 같다.

[천재들의 실패]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라는 헤지 펀드에 얽힌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나의 헤지 펀드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천재들의 실패]는 현대 금융을 꿰뚫는 원칙을 도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90년대 한껏 달아올랐던 금융 투기의 열풍과 그 붕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LTCM이 사용했던 마법의 기본 원리만 파악하면 텍스트북에나 나올 전문 용어들의 긴 목록을 몰라도 이해하기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천재들의 실패]는 LTCM이 사용했던 마법적 분석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LTCM이 사용한 마법은 투자론 시험 때 좋은 점수를 받게 해주었으며, 지금도 채권 상품과 파생금융거래를 이해하는 지침이 되어 주고 있긴 하지만 이것들이 내 삶의 지평을 마련해 준 것은 아니다. 되려 [천재들의 실패]의 이면에 담긴 금융 패러다임의 변화야 말로 나를 충격과 전율로 몰아 넣은 것 같다.

[#M_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거래하던 시대에 대한 향수| 난 회고주의자임이 틀림없다!| 대공황 이전의 윌스트리트를 다룬 책들을 읽다 보면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거래한다는 표현과 마주치곤 한다. 대주를 친 특정 주식을 무한정으로 사들이다 보면 결국에는 대주를 친 상대방이 거래를 청산하기 위해 나에게서 현물을 사야 하는 상황이 도래함을 말하는데 이 경우 대주를 오른손이 왼손으로 팜으로써 가격을 결정하게 된다. 사실상 대주는 주식의 가격이 떨어짐을 예상하고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충분한 자금력과 배짱만 있으면 가격이 떨어지리라 예상하는 시장의 힘을 무력화 시킬 수 있었던 시대가 대공황 이전의 윌스트리트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거래하던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소유권이 세분화된 오늘날로서는 한 개인이 무한정 주식을 사들이는 일도, 대주를 친 투자가가 결제를 청산할 현물을 구하기 불가능한 경우도 없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변화보다 더 큰 변화는 금융 산업에 속한 구성원들 자체가 변했다는 데 있다.

대주를 친 상대들을 배짱과 신용으로 몰아 세우던 메이저 플레이어의 자리는 수학적 분석력과 레버리지를 통해 작은 스프레드조차도 수십배로 극대화시키는 샌님들로 채워졌다. 옛 시대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명확한 세계였지만 오늘날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로 없다. 패자가 심하게 한을 품으면 승자가 누릴 시장 자체가 붕괴해 버린다._M#]
한계의 인식
그런데 난 이렇게 변화한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자신이 없다. 난 수학적 분석력이 뛰어난 천재도 아니고, 수십배의 레버리지가 주는 압력을 견딜만큼 내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도 얺는다. 복잡한 가격 방정식을 실제로 적용시킬 능력도 없고, 수많은 가격들이 주는 암시를 하나의 법칙으로 만들어 낼 창조력은 더더욱 없다. 하나의 기업이 지닌 과거와 현재를 경험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미래의 위험과 가격을 추정하는 데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사실 천재들의 실패는 매우 두려운 책이다. 시대는 변화했는데 난 이들 같은 천재도 아닐 뿐더러, 이들 같은 사람마저도 실패한 위험의 예측을 제대로 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자괴감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에게 이런 직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8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파생금융상품의 발전은 90년대 이르러 시장을 장악했고, 이제는 나 정도 재능의 사람은 발도 못 붙일 정도의 꽉 막힌 세계가 되어버린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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