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르떼 그리고 남부의 여왕

아르투로 레베르떼
나에게는 성장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소설가가 한명 있다. 아직까진 대가다움이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의 작가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그를 바라보는 일은 매우 즐겁다. 처음에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흔해 빠진 베스트셀러 작가였는데 이제는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주제를 이야기 속에 심어 놓을 줄 아는 의뭉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사실 레베르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소설이 아닌 영화를 통해서 였다. 폴란스키가 감독하고 조니 뎁이 주연한 나인스 게이트를 통해 그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의 그는 [검술가]와 [뒤마 클럽(이것이 나인스 게이트의 원작 소설이다)]으로 스페인어권 서점가를 술렁이게 만든 인기 작가였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 데 나인스 게이트는 뛰어난 배우와 감독이 손을 잡았음에도 원작의 졸렬함으로 실패한 케이스였다.

[푸코의 진자] 스타일의 이야기에 [전날의 섬]의 주인공인 로베르또를 덧입힌 소설이라고 나 할까? 가까이에서 보면 무난한데 멀리 서 보면 급조한 기색이 역력한 그런 소설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난 당시의 그가 평생 이런 소설만 쓰다 죽게 될 줄 알았다. 어딘지 마무리가 덜 된 듯한, 읽어도 끝이 허무한 그런 소설만 쓰는, 인기는 있으되 작품은 없는 그런 삼류 작가로 삶을 마무리 할 줄 알았다.

사실 나의 이런 예상은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까지는 잘 맞아 떨어졌다. 체스와 그림에 얽인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을 것이다. 어쩌면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도 이 정도 밖에 쓰지 못하는 재능의 빈곤을 비웃으며 레베르떼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한번 속는 셈 치고 사들인 [항해지도]와 [남부의 여왕]은 이런 선입견을 기초부터 허물어 버렸다.

남부의 여왕
개인적으로 난 세상에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마약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즐기는 커피와 초콜릿이 몇세기 전에는 마약으로 취급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의미한 몽롱함을 위해 소비되는 마약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실 도피를 위해서 약물중독자가 되어가는 피폐한 인간 군상들도 싫다. 그리고 마약의 몽롱함 같은 소설과 음악 모두 싫어한다.

하지만 마약상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삶이 담긴 [남부의 여왕]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것은 마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약계의 전설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라 애써 암시를 걸었던 것은 신념과 사람을 빨아들이는 소설의 매력 사이에서 방랑하던 나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리라. 아무튼 그렇게 나의 [남부의 여왕] 읽기는 시작되었다.

[남부의 여왕]이 멋진 소설인 이유는여자의 몸으로 마약 카르텔의 대모가 되어버린 한 여자의 삶에 있지 않다. 마약 거래라는 거칠고 험난한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보다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의 재미를 유지시키는 힘은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한 [여자의 변신]이다.

암달러상이나 갱스터의 정부, 혹은 웨이트리스가 미래의 전부인 멕시코의 소도시에서 삶에 길들어진 한 여자가 지브롤터 해협에서는 제트 보트를 모는 활동적인 마약 운반책이 되고, 카르타헤나를 주름잡는 우아한 마약상이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을 몰락시키기 위해 처음 도망친 그 장소, 마약을 제외하고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삶을 둘러싼 얇은 그림자
어쩌면 두꺼운 껍질 속에 숨겨진 본능이 적절한 상황을 만나 눈을 뜬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운명이 내던진 상황에 적응하면서 그녀는 조금씩 예전과 다른 성격과 태도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레베르떼가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 진짜 이유는 달라진 성격과 태도를 감싸고 있는 옅은 그림자의 존재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기 때문이다.

변화는 언제나 혼란을 유발한다. 그리고 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든다. 새로운 상황은 어제와 다른 성격과 태도를 요구하며, 여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하게 된다. 하지만 특이한 사실은 아무리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아니 적응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과거의 그림자에 깊게 얽매인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옅은 그림자는 의식을 지배하는 이성이 약해진 순간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다. 변화한 성격과 태도가 가면이 아닐까 할 정도로.

사실 [남부의 여왕]을 읽기 시작하던 당시의 난 변화에 목말라 했던 것 같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과거에 얽매인 나 대신에 앞만 보고 달려가는 그런 삶이 펼쳐지기를 원했던 것 같다. 종국에는 삶을 둘러싼 옅은 그림자에 이끌려 원점으로 회귀하더라도 변화 자체만으로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믿었던 듯 싶다.

[#M_ 그런데 | 안다. 안다. | 이제는 변화를 추구하는 내가 아닌 진짜 다른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다. 가끔씩 찾아오던 얇은 그림자가 머리맡에 머물고 있음도 안다. 그리고 언제인가 얇은 그림자의 손을 붙잡고 원점으로 되돌아갈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냥 지켜볼 수 밖에 없어 슬프다는 사실도 안다._M#]

2 thoughts on “레베르떼 그리고 남부의 여왕”

  1. 난 아직도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자네도 알고 있겠지.
    정작 변화가 필요한 사람은 나인데.

    또 약속을 못 지키겠군.
    이번에는 매우 부끄러운 수준이야.
    입버릇처럼 말하던 신조가 무색해지는 군.

  2. 19% 남았다.
    이틀 안에 끝내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분량이지.
    토요일에는 샤갈전도 보고 우리의 지선군도 보자구.
    떠나기 전에 방에 모셔둘 단란한 사진도 찍자구.

    과거란 꽤나 유용한 존재야.
    지친 걸음으로 귀가하는 길이 심심하지 않은 것은
    나를 흐뭇하게 만들 수많은 꺼리가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때는 죽을만큼 힘든 일도
    시간이 지나면 전부 산책의 흥을 돋우는 향신료가 된다는 사실이지.

    하여튼 힘내. 우리 강인하게 키워진 놈들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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