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차를 기다리며 투정 부리다.

메시지
하루에도 난 수많은 [말]들과 마주치게 된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대화와 글들,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한 마디]를, 삶에 지속적이고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한 마디]를 만나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그런 말과 조우하게 되더라도 찰나의 순간에 삶의 계시가 될 [한 마디]를 제대로 평가하고 수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04년 2얼 27일 10시 40분 경, 내 삶을 스쳤던 짧은 대화는 지난 반년 간의 내 삶을 결정지은 [한 마디]였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어쩌면 수 십년 동안 난 이 [한 마디]를 기억하고 추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리 어려운 문장은 아니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삶을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 하나의 문장을…

어쩌면 이 문장은 하나의 코드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입버릇처럼 말하던 [난 표절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여자를 사랑할 꺼야]와 같은 잠재 의식 속에 숨겨진 코드일지도 모른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날 어제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다.

묘사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난 소위 연예 편지의 달인이었다. 화려한 어휘와 수사법으로 무장된 내 편지는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상당한 가치를 지녔다. 알 듯, 모를 듯한 문장으로 십대 후반의 감수성을 아리는 그런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시의 난 지금처럼 산문적인 사람이 아니라 멋과 맛을 아는 운문적인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삶이란 지독하게 빠르게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라서 부지불식간에 난 profit과 performance로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못된 놈이 되어버렸다. 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 로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로 묘사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못된 놈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런데 녀석 앞에서면 머리 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늘 활발하게 작용하는 두뇌의 화학 작용이 멈춘 듯. 기억은 희미하고 사고력도 느리게 운용된다. 한참 뒤에야 실수를 깨닫고 황망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좌불안석이다. 녀석에 관해 무언가 기록을 남겨 보려고 펜을 들면 황홀함에 취해 버린다.

한 두번 스친 친구의 친구마저도 기억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나 될까? 매일 봐도 난 평생 그 얼굴을 모조리 기억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매번 들을 때마다 목소리가 새롭다. 믿기 지는 않지만 정말 그렇다.

어쩌면
어쩌면 미래의 난 녀석의 선택이 내가 아니라는 시그널을 민첩하게 포착해낼지도 모른다. 커피를 같이 마시다가 우연히. 혹은 밥을 먹다가, 혹은 지하철에서. 아마 그때의 난 태연 그 자체를 가장한 채 시그널의 행방에 대해 지나가는 투로 물을 것이다. 물론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겠지만, 한숨 쉬고 있겠지만 꿋꿋함을 가장한 채 말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혼자 체념하고 이제는 다른 것을 추구하겠노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할 지 모른다.

나 역시 성과급으로 하프 밀리언을 운운하는 직장을 가지고 싶다고, 결혼이나 안정된 가정보다도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추구하고 싶다고, 레지던트 빌에 거주하는 잘 나가는 삼십대가 되고 싶노라고, 쉰이 되기 전에 은퇴해 항해왕 엔리케의 등대가 보이는 리스본의 작은 맨션에서 대가들의 책과 회화를 즐기며 그렇게 죽고 싶노라고 다짐할 지도 모른다.

막내 누이와 나는 요정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 기회가 올 때를 대비해 요긴한 소원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즘의 내 소원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Nr 20이 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그널의 주인이 되는 것. 꿈이 현실이 되는, 바라는 것이 모두 현실이 그런 마법 같은 삶은 아니어도 좋으니 이 두 가지 소원만큼은 진짜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3 thoughts on “새벽 기차를 기다리며 투정 부리다.”

  1. 음….진심이군.
    위험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그때의 경험 때문에 다소 누그러진 어감이지만….위험해.
    하지만 한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은 부럽군.
    난 내 스스로가 싫어질 만큼 바람끼가 다분해서.-_-

  2. 과거는 잊어달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과거보다는
    오늘이 소중한 거라고 생각해. 과거에 목매여 아무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은
    혹은 지금 내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상황은 어리석다구.

    아니다. 솔직히 전부 다 기억하고 있군
    아마 2002년 12월 11일쯤이 아닐까 싶은데.
    좋은 배경이 되고 싶다고 했었지 아마 내가?
    단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그런데 난 그것마저 허락받지 못했고 내 자리는 처절하게 비워졌다고
    내가 배경에 있는 것조차 싫은지 회칠을 하는 통에
    낯선방에 들어와 있는 듯 당황했지.

    그때와 지금이 동일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이를 먹었고, 조금 더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워졌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란 괴물이 나에게도 생각이란 것을 가져다 주었잖아?

    나에게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인지. 지금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진짜 걱정되는 것은 너야.
    나 걱정시키지 말고 공부 좀 해달라!

  3. 내가 세뇌시킨 미신을 정리해볼까?
    1. 의자를 빼놓고 자면 귀신이 그 자리에 앉아서 자는 모습을 구경한다.
    2. 죽고난 후 지옥에서 자신이 평생동안 남긴 음식더미 위에 앉아서 다 먹어야한다.
    3.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화를 내면 바로워즈의 복수로 다시는 되찾을 수 없고, 분실물도 점점 늘어난다.
    4. 언젠가는 요정에게 세가지 소원을 빌어야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항상 그때를 대비해라.

    넌 너무 어릴 때라 까마득하겠지만, 그 미신들 모두 내가 세뇌시킨거야.
    미안하다 아우야. 빨리 벗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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