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 재정정책의 우울한 그림자

정부는 다음 회계연도에서 적극적인 재정 확장 정책을 기조로 하는 일련의 예산을 발표했다. 아직까지는 국가 채무 상태가 양호하고 연관 효과가 높은 건설업을 위주로 재정 확장 정책이 수행되기 때문에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리라는 의견과 원유 및 각종 원자재 가격 상승한 상황에서의 확장 정책은 물가에 압박을 가할 뿐, 소비 심리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사실 이런 의견 대립에서 각자가 논거로 삼는 이유들은 모두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확장 재정 정책의 찬반자들 모두 이론적 모델로서는 흠잡을 때 없이 완벽하고 타당한 설명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리를 중요하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반대자들의 의견이 더욱 솔깃하다. 이대로 가면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때 늦은 확장 정책
만약 작년에 정부가 확장 정책을 사용하기로 발표했더라면 아마 난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정책을 최선의 정책으로 삼는 정부보다는 어느쪽으로든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올 1/4분기까지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확장 정책은 너무 위험하다.

사실 작년 말과 올해 초 한국 경제가 가진 문제점은 구심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부와 기업, 민간의 신뢰 관계는 위험수준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었고, 정책은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적인 정책이던, 진보적인 정책이던 일관된 정책을 발표한다는 사실은 신뢰성과 방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마 작년에 재정 확장 정책이 예고 되었더라면 사람들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지만 경기 낙관론에 동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작년과 조금 다르다. 현재의 신뢰 관계는 위험 수준보다 한참 아래다. 올 초 발표된 정부의 경기 낙관론이 근거 없는 낙천주의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상황이고 현재의 재정 확장 정책은 DJ시대의 확장책과 다르게 경기 전망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가에 대한 자기 실현적 예언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부분이다. 정부가 확장 정책을 펴도 사람들은 실질적인 경기가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업자가 줄어든다거나 소비의 활성화는 어렵지만 과도한 통화 공급의 증가로 물가는 상승하리라고 내다본다, 원자재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이 최종산출물의 가격 상승을 주도하리라는 두려움. 이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을 가장 확실하게 가져오는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되고 만다.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속임수란 말이 있다. 실제 정책을 집행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심리적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 정책을 실제로 집행하지 않아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성이 중요하다.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정부의 정책을 신뢰할 수 없다면, 더욱이 못 믿는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상황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면 심리적 환상을 의도와는 정반대 반향으로 향하고 만다. 현재 우리의 상태가 이렇고 어떤 정책을 내놓던 간에 정책의 외부 효과가 클 것이란 전망을 뒷받침 하는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소득세 1%인하 이면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세부담률이 해마다 늘어나면서 가계의 조세저항도 점점 커지고 있다. 지자체의 세외 수입의 연체률은 연체률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이고, 지방세나 국세의 체납률로 덩달아 올라가고 있다. 조세라는 지출 재원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재정 확장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채의 발행으로 매울 수 밖에 없다. 소국개방형 경제 체계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과도한 국채 발행은 다양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중에서 현재 우리 경제에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정부는 확장정책에 이어 조세 감면 정책까지 추진하고 있다. 소득세의 1%인하 방안. 사실상 고소득층의 소비 증진을 겨냥한 정책이다.(고소득층에는 높은 한계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정률의 감세안이 선택될 경우 절세폭이 더욱 크다) 특소세의 인하 또는 면세 정책도 동일한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가처분소득을 늘린다고 해도 소비의 활성화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일반적으로 고소득층일수록 경제 정책에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감한 만큼 자주 번복되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안감도 크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감세 정책에 덜컥 소비를 늘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소비를 늘리지 않아도 물가 상승에 의해 소비지출액이 늘어난다면 감세 정책은 내수 진작 정책으로는 낙제감이다. 게다가 이 경우 절세폭이 작은 중산층 가계는 상대적으로 더 불평등하게 된다.

디노미네이션
개인적으로 난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논의 자체는 반대하지는 않지만 시기 상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디노미네이션은 심리적인 영역에서만큼은 물가가 하락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준다. 종래의 화폐 단위보다 작은 단위의 화폐로도 구매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노미네이션은 실제 물가를 올린다. 고액의 화폐 단위에서 세분화 되어있던 제품 가격이 디노미네이션 과정에서 상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액권 발행은 어떨까? 고액권 발행은 일반적으로 화폐의 유통 속도를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 소비의 편의성을 높이고 이것은 상품 소비를 늘린다. 물가 상승이라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디노미네이션만큼 높은 메뉴 비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액권 발행은 충분한 논의를 거쳤기에 도입의 거부감이 크지 않지만 디노미네이션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

사실 디노미네이션의 또 다른 표현은 화폐 개혁이다. 화폐 개혁은 장롱 예금을 활성화 시키는 수단으로 혹은 재정 적자나 부채를 평가 절하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다. 하지만 효과가 확실한 만큼 부작용과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좀처럼 시행되지 않았던 제도다.

그런데 문제의 현재 우리의 상황이다.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화폐 개혁이 필요할 정도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 단지 달러나, 유로에 비해 화폐 단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경제의 불안정성이 너무 크다. 평화로운 시기, 안정된 경제 상황에서 채택해도 많은 비용과 혼란을 감수해야 하는 정책을 요즘처럼 경제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 성급하게 도입하려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신뢰성이다
정책의 성공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성이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좀처럼 지켜지지 않은 원칙인데 현재의 정부는 신뢰성에서 만큼은 낙제다. 일관성 없는 정책. 상황에 따라 바뀌는 정도를 넘어 오늘의 정책이 다음 분기에 유지될지조차 불분명하다.

해외의 유명 이코노미스트들은 한국의 경기 침제가 일본의 90년대처럼 극심한 불황으로 점철되지 않겠지만 현재의 침체 상태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 예측한다. 무언가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이 나타나 경제를 견인하지 않는 한 장기 침체를 피하기란 어렵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기도 어렵지만 설령 적절한 패러다임이 나타나도 요즘 같은 엇박자 상황에서는 효율적인 시스템 재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경제나 정치나 인간 관계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이해가 얼마나 맞아 떨어지느냐가 아니라 상대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신뢰성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 채 무리한 정책 남발로 자충수를 두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혹은 내일까지…

4 thoughts on “확장 재정정책의 우울한 그림자”

  1.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자네의 생각에는 적극 찬성이야.
    화폐개혁도 그렇고 요즘 경제는 뭐 하나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이 없다.
    가장 큰 우려는 역시 원자재값 상승으로 인한 스태그플래이션이겠지.
    하지만 원유가 만을 놓고 볼 때는 상승율이 지금보다 더한 시기도 있었으니
    유가 압박에 대한 두려움은 적은 편이야. 진정한 두려움은 해외
    이코노미스트들이 지적했듯이 국가를 이끌 신산업이 없다는 것이야.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원자재값의 상승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이고,
    앞으로 인도 마저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원자재값이 상승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거야.
    자네 말대로 어르신들이 정신 못 차리고 경제의 갈피를 못 잡는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를 뛰어넘는 상황이 벌어지지않을까 생각된다.
    남미국가들의 뒤를 밟는 절차만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지금의 바램이랄까…

    음…내가 썼지만 덧글이 참 엉망이군.ㅋㅋㅋ

  2. 디노미네이션이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긴 해.
    논의 차원이야 괜찮겠지만 서둘러 입법화할 경우 부작용은 엄청날 듯.

    원자재 문제에 대해서는 사재기에 따른 가격 상승도 만만치 않아.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률 보다 국내 가격 상승률이 두드러지더라구.
    아무래도 대기업이나 투기 목적으로 사들이고 있는 듯 싶었어.

    원유에 대하서라면 나 역시 낙관적이라고 생각해.
    오일쇼크처럼 카르텔이 강력한 시대도 아니고
    가격이 너무 올라 소비량 자체가 줄어들면 손해라는 사실을 정유사가
    더욱 잘 알고 있거든. 소비자가 아예 소비 자체를 포기하는
    가격선까지 올라가겠지. 정유사가 생각하는 적정 이윤의 크기가
    매우 궁금하기도 하지만 수급 불균형으로 석탄 시대로 돌아가는
    회귀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저번에 한번 미국내 정유산업에 대한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는데
    상당히 흥미롭더라구. 주마다 규제가 달라서 정유 비용 차이가 크다더군.
    생각해보면 규제가 정유 능력(혹은 생산량)에 영향을 미친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규제를 일시적으로 완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생산량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뭐 최후의 수단이지만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

    참. 중국의 원자재 사용량이 눈에 띄게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같은 국내 원자재 가격 상승의 주범으로 몰기에는 어렵지.
    심리적인 요소이긴 한데 대부분의 대기업은 올해 혹은 상반기 물량을
    이미 확보해 놓은 상황이라 하더라구.
    결국 사재기가 문제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이 깨진 상황에서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문제지. 조금 복고적인 정책이긴 하지만
    원자재난 초기에 쿼터제를 탄력적으로 운용했어야 했다고 생각해.

    아무튼 설마 남미같은 상황이 벌어지기야 하겠냐만은
    우리 세대는 저주받은 세대가 되겠지. 고속 성장 시대은 물건너 갔고
    삼류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내가 오너라면 HQ를 기업하기 좋은 쪽으로 옮길 것이야.

  3. 사제기는 어쩔 수 없잖아. 나중에 구할 수 없다는 심리가 깔려있으니..
    특히 건설업 쪽에서는 철강제품과 같은 것들은 거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으니 아무 혈안이 되서 사제기를 하는 것 같더라.
    지금도 그렇겠지만 매년초에 한해동안 필요한 물량을 대부분
    확보해 놓고 있더라. 게다가 지금과 같은 불확실한 경제상황에서는
    그 행동이 더욱 크겠지. 그래서 사제기 같은 것도 발생할 것이고.

    중국의 원자재 사용으로 인해 국제 원자재값의 상승이 있었고,
    물량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물량 확보에 따른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 사제기를 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국내 원자재값의 상승이
    유발되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지는 않을까?

    고유가에 대한 대책은 지난 오일쇼크 이후 일본 자동차 업계가 보여주었던
    기술혁신이 일어날 것 같다. 물론 그때와는 다르게 더욱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을 하는 상품들이 생산되겠지? 또한 석유가채연수가 어차피
    약 60여년 정도로 짧기 때문에 신기술들이 속속 나올 것이고.
    우리나라가 신산업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고효율 가전제품
    혹은 냉난방시설 등등..대체 에너지를 사용한다던가.
    신개념의 발전소 시설을 개발한다던가 하면 좋지 않을까.

  4. 당초 윈인이 중국의 원자재 사용량 증가에 있다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특수 상황을 중국탓으로 돌리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봐.
    시장에서의 경제 주체들이 조금 더 합리적이었더라면
    이 정도의 가격 상승은 일어나지 않았을테니까 말이야.
    문제는 정도라고. 원인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가가 일어났는지 분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해.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중국탓을 돌리기에는 시장 매커니즘이 이상하단 말이지
    우리 나라의….

    유가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기술 개발보다는
    저황 기준을 낮춤으로써 생산 코스트를 낮추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당장 가격이 임계치에 다다르면.
    기술 개발보다는 저황 기준을 낮춤으로써 생산량 증대와 코스트 다운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거든. 게다가 이 편이 속도도 빨라.

    아무튼 난 기술 개발에는 회의적이다.
    에너지의 법칙이란 것은 매우 신기한 것이라서
    소비량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거든.
    실제로 고효율 에너지 기반 기술이 얼마나 활용되고 있는지
    명확한 통계는 없지만 회의적이라는 것이 유명한 자동차 분석가들의
    입장이야. 물론 겉으로야 환경 친화적인 이미지를 구사하고 있겠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 아닐까?

    사람들은 기업의 목적을 어떻게 정의내리는 지 모르겠지만
    소비자나 기업이나 모두 고효율이면서 비싼 제품을 보다는
    싸고 저효율적인 제품을 선호하다면 무엇이 정의일까?
    좋은 기술보다는 적합한 기술이 더 낫다라는 말을 기억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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