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나만의 베스트셀러

난 표절을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할 꺼야
정확하게 언제부터 생각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망상이 하나 있다. 서가를 맴돌다가 [표절]을 꺼내 드는 아가씨를 보게 되면 망설이지 않고 책을 꺼내든 손목을 꽉 움켜쥐겠다고. 예의와 배려가 무엇인지 모르진 않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그 아가씨에게 애인에 되어 달라고 청할 거라고,

생각해보면 표절을 처음 읽은 순간부터 난 늘 입버릇처럼 [난 표절을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할 꺼야]하고 읊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난 읽다 분실한 책을 제외하고는 절대 책을 두 번 사들이는 법이 없는데 [표절]만큼은 꽤나 많이 사들였던 듯 싶다. 생일이면 주변 친구들에게 표절을 한 권씩 선물하곤 했는데 정작 나에게는 한 권도 남아 있지않다. 베스트셀러의 정의가 말 그대로 많이 팔린 책을 의미한다면 내 지갑을 가장 홀쭉하게 만든 책으로 [표절]을 따라갈 책은 아마 평생 없을지도 모르겠다.

피슈테르씨의 소설에 대한 관전 포인트
[표절]의 관람 포인트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작가만이 느끼는 창조력의 빈곤이라는 벽을 뛰어넘은 파브리를 파멸시킬 장치로 주인공 에드워드가 준비하는 표절 의혹, 표절이란 방법을 통해서까지 파브리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동기, 그리고 스스로를 회색 인간이라 생각하는 에드워드의 독백…

사실 복수극은 언제 어디서나 재미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높은 흡입력을 자랑하는 이유는 복수극만큼 짜릿한 재미를 선사하는 장르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복수극을 표방하고 있는 표절도 이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복수극에서는 복수의 방법이 독특하면 독특할수록 더욱 흥미로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방법의 독창성에서 표절은 지금껏 출판된 어떤 이야기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복수극이 보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책장을 넘기는 가속도다. 책장의 끝에 이르러서 다시 처음으로 시선을 돌아가게 만드는 힘은 흥미로운 복수극이 아니라 독자가 얼마나 주인공의 동기에 몰입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에드워드 램(혹은 데스트리)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소설 속의 캐릭터에 매혹당한 기억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얼마되지 않은 경우에 동성애자에다가, 추남이며, 재능이라고는 원고 냄새를 맡는 것 밖에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 이 회색의 캐릭터가 끼어있는 이유를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엄연하게 따져보자면 본인의 탓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불행을 남에게 전가 시키고 복수하려는 이 남자의 마음새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 매우 어린 시절에는 책과 출판이라는 소재에 매혹되었다고 생각했다. 잃어버린 첫사랑과 전쟁으로 정신적 거세를 당한 이 남자에 대한 동정이 캐릭터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사랑의 애틋함도 가물가물하고, 꽤나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겪어본 지금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캐릭터를 이해하게 된 듯 싶다. 자신의 상태를 놀랄 만큼 냉정하게 분석하는 힘이, 현재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을 효율적으로 복수에 사용하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분노를 추종하지 않고도 앙갚음을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이 캐릭터 자신감에 동화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라노를 생각하며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하고 있노라면 난 시라노를 생각한다. 표절의 에드워드 역시 거울을 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시라노의 못생킨 코보다는 내가 조금 더 잘 생기긴 했지만 시라노는 헌신할 상대를 가졌고, 시대를 앞선 문재를 지녔던 반면, 나에게는 사랑할 상대도, 문재도 모두 없다고… 그리고 내 사랑과 문재를 모두 앗아간 상대를 발견한 순간 사내로써 모든 힘을 다해 복수를 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에드워드와 내가 느끼는 동질감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비서에게나, 혹은 아이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될 뿐]이라는 에드워드의 독백에 우리는(wc군과 나를 지칭) [친구로 괜찮지만 애인으로는 영 아니다]라는 주변의 평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곤 이내 복수 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사랑 받기에는 부족한 우리의 상태를 절감한다.

붙박이 가구처럼 필요할 때가 아니면 존재가 흐릿하다라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에드워드의 복수는 대리만족이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반역의 메시지를 은연중 가슴 속에 심어 놓는다.

나만의 베스트셀러
[표절]은 규모에 상관없이 어느 도서관에나 한권쯤 가지고 있는 책이다. 장정이 입혀지지 않는 표지는 너덜너덜해져 있기 일 수고, 손때 묻고 구질해진 책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눈쌀을 찌푸리기에 딱 알맞다. 하지만 [표절]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네거티브한 에너지를 인정하고 표출 시키는 이상한 주술을 가지고 있다. 나의 십대를 바꿔놓았고, 오늘의 나를 만든 이 기묘한 주술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명한 역사학자인 피슈테르씨가 왜 전업 작가가 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표절]에 담긴 캐릭터와 소설적 장치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특별한 것이 있다.

19 thoughts on “표절-나만의 베스트셀러”

  1. 표절땜에 글쓰기에 자신이 없어졌지.
    내 머리의 한계를 뼈져리게 느끼며 겸손해졌다고나 할까나.
    그런데 익아!! 그럼 넌 장가못가겠다..
    차라리 맘에 드는 여자에게 표절을 선물해라.
    그게 빠르겠다….
    난 너 혼자 사는 것 싫거든….

  2. 표절이 사람 여럿 버려놓았지.
    두세번째 읽을 무렵부터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나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되고.
    리뷰에 쓰지는 않았지만 이 공포감이 장난이 아니라구.

    글을 쓰다가 순간적으로 타인의 문장을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에 놀라고
    그 단계를 지나가면 전업작가도 아닌 정말 근엄하고 유명한
    역사학자인 피슈테르 양반의 사고 방식에 놀라지.
    점잖은 노인의 표정 속에 감춰진 긴장과 상상력에 놀란다고 해야할까?

    사실 표절에는 문학이 표현해야할 보편적인 사상이나 삶은 없어.
    캐릭터와 플롯만 있는 대표적인 <소설>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먹어가는 것을 보면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특수한 삶을 반영하기는 한가봐.

    그나저나 정말로 그냥 표절을 선물해 버릴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일종의 시그널링이 될 수도 있겠네.
    누나 덕분에 마음 속에 온갖 사악한 상상들이 나래를 펴고 있어. 첵임져!

  3. 할 수 있으나 다만 참고 살아갈 뿐이지. ^^
    난 가끔 조금씩 분출할 때도 있으나 자네는 정말 드물단 말야.
    아무튼 5개월 내로 돌아온다는 녀석의 말이 약간은 희망을 가져다 준다.

  4. 그런 결심을 할 정도로 좋아하는 책이 있다니.. 저로선 부럽습니다.
    근데 서가에서 책을 빼드는 정도로는 좋아하는지, 어쩌는지 판단하기가 그렇지 않나요? -.-;;;

  5. //큰누이
    책임 질테니… 그 다음에 뭐?

    //wc
    분출을 자주하지 않은 대신에 대형 사고를 치잖아.
    그리고 나서 얼음장처럼 무표정하게 굴고…
    결정적으로는 내 삶을 물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투정부리지.
    추석 연휴 잘 보내시게. 내일 공항에 나가면 나대신 인사 전해주고
    은영씨 만나면 안부 전해주게. 19세기풍의 편지 도령도 잘 있다구.

    //반딧불이
    판단하기도 어렵고, 이성적인 이유같은 것은 없으니까 망상이죠.
    그런데 아직까지 단 한번도 서가에서 표절을 꺼내드는 아가씨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십년 전에 나온 책이라 절대 손이 안가는 위치에
    놓여있기 일 수 거든요. 사서로 일하던 친구말에 의하자면
    두달에 한번꼴로 대출된다더군요.
    1년에 6번의 기회중에 그 중에 반은 사내일테고.
    나머지 3번의 기회중에 제가 그것을 목격할 확률은 사막에서 바늘찾기라는.

  6. 아무리 읽어도 야스미나란 이름에서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환영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걸?

    그리고 딸 셋에 아들 하나라고 광고를 해라.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나.

  7. 걱정마, 걱정마, 겉보기는 딸딸딸 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아들 삼형제잖아.
    주먹날라온다. 도망가야지! 익아, 메롱~

  8. 아들 셋에 딸 하나라고 주장하고 싶은거지?
    거울 속에 담긴 난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맞는데
    왜 날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섬세한’이란 수식어를 달아주는 것인지…

    하여튼 누나의 테러를 보고 있자니
    십대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은 괜찮네.

  9. 너의 큰형이다 아님 큰오빠인가…ㅋㅋ
    우린 아들 아들 아들 에 딸하나다…
    수정한다 익아 ㅎㅎ

  10. 그만 그만…
    과유불급이라고 뭐든지 적당히 해야 재미있다고.
    같은 소재를 두번 재탕하는 것은 빈해 보여.
    그러니 여기서 그만^^

  11. 저, 이 책이 친한 친구(베스트셀러를 쓴)의 야심작을 표절작으로 만들어 버리는 내용인 책이 맞나요? 첫사랑이 자기 때문에 가족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아닌 친구 때문이었다는 것이고.(첫남자는 비록 주인공이 맞지만) 제가 읽었던 책 제목도 <표절>이었는데 이 제목으로 다른 소설들이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요.

    만약에 맞다면…. 음…. 저는 아이디어 자체는 상당히 좋아했는데 울림이 큰 작품이라는 것은 못느꼈는데. 말씀하신대로 마이너스 감정을 은밀하게 자극하는 부분이 매혹의 요소였던 것일까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다는 느낌은 물론 받았지만요. 제가 ‘복수’라는 모티프 자체에 감흥이 떨어지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여하튼 같은 소설이 맞다면 구석에 처박혀있는(당대의 베스트셀러는 아니었던 – 맞죠?;) 같은 책 읽는 블로거분을 알았다고 기뻐해야 할 일이군요.

  12. 같은 책이 맞습니다. 저나 제 주변의 경우에는 야스미나(첫사랑)를 잃고 남성성을 상실했으며 굴욕감과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에드워드(주인공)란 캐릭터에 완벽하게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파블로(친한 친구)같은 인물은 존재하는 법이고, 완벽한 복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던 셈이죠.

    사실 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남성적 소설같아요. 남과 여의 이분적 마초이즘 소설은 아니지만 권력관계를 기초로 인물 관계가 형성되어 있죠.(이 소설에서 여성은 하나의 환상이 아니면 권력 관계의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마초이즘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그 권력 관계에서 주인공은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의 복수를 통해 작가는 이 특수 권력 관계에서 신음하는 독자에게 구원인 동시에 반란인 메세지를 보내고 있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말 흥미 만점인 소설이지요.

    한 친구에 의하면 주인공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괴로운 추억들이 머리속에 떠오른다고 해요.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복수자가 되어 멈칫거리는 에드워드에게 죽음의 신호를 보낸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저나 친구나 모두 비뚤어진 사람들 같습니디만 현실에서는 이런 복수는 꿈도 못꾸는 소심한 군상들이기에 더욱 소설에 열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

    유명한 작가도 아닐 뿐더러, 베스트셀러 근처에도 오르지 못한 이 책으로 나누는 대화가 저 역시 매우 기쁘답니다.

  13. 표절은 꽤나 흥미있는 책이지요. 저도 오래전에 읽었지만 문득 기억이 나서 포스팅 했었습니다. 트랙백 보냅니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듯 하군요. 저도 로마사등의 역사물이나 심리스릴러 계통을 좋아합니다.

  14. 이번에는 도서 리뷰입니다.
    ‘표절’은 최근에 읽은 책은 아니고 거의 10년전쯤에 읽었던 책이군요. ;;
    뒤죽박죽인 기억속에서 왜 이 책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는

  15. 불쑥 보낸 트랙백인데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비오네님 포스팅 읽기 전까지는 표절이 영화화 되었다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오래된 책이지만 흥미있는 소설이잖아요. 저도 역사물이나 스릴러 계통을 좋아한답니다.

  16. 매우 좋아하는 책입니다.
    예술 비평을 다루는 교양수업에서 표절에 관한 레포트를 쓰려고 도서관을 찾았다가 만났죠 하핫.
    정작 레포트에 필요한 책은 빌리지도 않고, 집에 오는 버스에서부터 게걸스레 읽은 기억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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