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덫-Trap

[#M_ 여기까지가 | 책 읽는 중에 한 딴 생각 |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A4 몇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을 책 한권으로 꾸몄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있다. 지겨운 동어 반복으로 한번 잡은 책은 끝까지 읽는다는 윈칙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책들. 예를 들자면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의 [마케팅 불변의 법칙]같은 책들 말이다. 사실 마케팅 전공에서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의 지위는 거의 신화적이어서 마케팅 원론의 부교재로 지정되는 것은 일상 다반사이다.

하지만 이 책에 관해 감히 평가하자면 서문만 읽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5줄 정도의 문장으로 요약되는 책을 A4 2장으로 요약하라는 레포트는 아무리 만연체와 기만을 사랑하는 나의 작문법으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리고 아주 가끔 마주치게 되는 리스와 트라우트의 추종자들을 만나게 되면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제대로 읽기는 하고 저들을 추종하는 거냐고. 다섯줄 짜리 인식을 가지고(그것도 이제는 너무 보편적이다) 삼 사년에 한 권씩 책을 찍어내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원칙이 무엇이냐고. 한참 파리의 연인이란 드라마가 방영중이었을 때 박신양이 언급한 [마케팅 불변의 법칙]과 [수익 경영의 달인]이란 책 덕분에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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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와 트라우트식 글쓰기
장하준 교수의 개혁의 덫(이하 Trap)을 읽으면서 곁가지로 떠오른 생각이다. 사실 사전에 서문을 읽어보지 않고 인터넷에 주문한 최초의 책인데 저자의 명성과는 다르게 Trap은 꽤나 많은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실제 강의나 강연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신문 지상을 통해 발표되는 기고문이나 인터뷰를 통해 꽤나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균형잡힌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Trap은 좋은 학자란 단지 다양한 시각과 균형잡힌 성격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란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사실 Trap의 내용 자체가 일방적이거나 독선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 하나의 에세이의 수준은 폭넓은 시각과 의미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들이 책 한권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A4 5장 정도면 책 한권을 요약할 수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리스와 트라우트식 글쓰기가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자신이 쓴 글이라도 다른 글에서 동일한 내용과 소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믿는 나에게 장하준 교수의 글쓰기는 다소 비양식적인 것으로 보였다. 차라리 30페이지 팜플릿에 수많은 참고 자료가 붙은 책이었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저자의 네임 밸류라는 부차적 요소에 판단이 흐려진 나의 구매에도 문제가 있지만 네임 밸류에 걸맞는 책을 만들지 못한 저자의 잘못도 크다.

Nevertheless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rap은 나름대로 분명한 교훈이 있다. 다시는 진짜 책을 읽어보지 않고 구매하는 우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따위의 저차원적인 교훈이 아니라 영미식 경영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나 자신에 대한 우려와 내 시각에 쌓인 편견의 침전물에 대한 반성이다.

사실 외환 위기 이후 영미식 글로벌 스탠다드가 커리큘럼의 표준으로 잡힌 시대에 대학에 들어간 나로서는 영미식 경영은 일종의 바이블이었다. 주주를 위한 경영, 가치 경영와 노동 시장 유연화, 시장 원리의 존중이라는 화두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유럽과 일본식 경영은 한참 잘나가던 영미식 경영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결함많은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유럽과 일본식 경영을 제대로 알고 판단 하기보다는 책장에 보관 중인 영미 학자들의 저술을 읽고 그저 나쁘다는 편견을 유지했던 듯 싶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기준이 한국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고, 반론을 펼 적절한 이론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Trap은 이런 나의 편견에 일침을 가한다. 제조업보다 금융업이 더 중요하다는 환상과 앵글로 색슨의 경영이야 말로 진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지난 몇년 간의 믿음에 말이다.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 지금의 개혁이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낭비라는 사실에는 분명하게 동의하지만(차라리 가만이 있음만 못하다) 무엇이 장기적인 비젼과 전략의 토대가 될지는 모르겠다. 한국식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의견에 수긍은 가지만 모든 원칙과 기준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무엇이 한국식 해결 대안으로 등장할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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