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클럽

내 삶에는 너무나 많은 타인의 취향이 남겨져 있다. 지금 나를 알고 있는 이들이 당연히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취향조차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는 나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스쳐가고, 시간은 흘러도 습관에 밴 취향만큼은 남는다는 소소한 교훈에서 언제쯤에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주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도 이것이 누구의 영향력인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내 자신이 때로는 싫어질 때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서점에 갔을 때 내 선택의 범주에 <단테 클럽>이란 책은 없었다. 이런 저런 전공 서적과 실용 서적으로 이루어진 구매 리스트가 무척이나 삭막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을 무렵에야 난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소설 한 권을 선물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 <소설 한 권>으로 내정해 두었던 책은 <다빈치 코드>였다. 하지만 막상 서가에서 <다빈치 코드>를 뽑아둔 순간 타인의 취향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로.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푸코의 추>와 이런 저런 역사 미스테리물에 어린 시절을 헌납했던 너에게 그리 재미있는 소설은 아닐꺼야. 프리메이슨에 흥미를 지닐 나이는 지났잖아? 풍부한 상상력으로는 빈텐부르크를 따라가지 못할 테고, 박식함으로는 에코를 따라가지 못할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어딘지 어색해 보여. 저자가 르네상스에 얼마나 전문가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를 전공한 학자가 아닌 이상 내 머리가 기억하는 지식은 너무 많다고. 소설은 즐기기 위해서 읽는 것이지 비판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다 읽는 소설은 너만의 소설이 될 수 없잖아.

2분간의 갈등 끝에 난 <타인의 취향, 혹은 그녀의 취향>에 굴복했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할만한 이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단테 클럽>이란 제목의 추리 소설이었는데 올리버 웬들 홈스와 롱펠로우라는 이름 앞에서 난 그녀가 좋아할 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준 높은 문학성을 보유한 책은 아니지만 어쩐지 19세기 중엽의 보스턴(정확하게는 Civil War가 막 끝난 무렵의 보스턴이다)이라는 소설적 배경에 이끌리는 그녀가 눈앞에 서 있는 듯 했다. 결국 난 또 한번 <타인의 취향>에 굴복했다.

어린 시절 <남과 북>이란 텔레비젼 시리즈를 통해 본 Civil War는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서사시가 지닌 수준 높은 감수성은 현실 인식이란 항목에 밀려버린 듯 싶다. 노예 해방이란 숭고한 기치 대신에 자유 무역과 보호 무역이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대립하던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투쟁이 머리 속에 들어오면서 Civil War 꿈이 아닌 현실 속의 무엇이 되어버렸다. 그와 함께 19세기 미국 문학에 대한 편견이 자리잡기 시작한 듯 싶다. <아침 식탁의 독재자>이던 롱펠로우의 아름다운 시구이던 앨런 포의 환상이던 간에 현실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고 그렇게 믿었던 듯 싶다. 치열한 삶의 현실을 외면한 문학에 시대의 정수가 담길리가 없다고 추정한 듯 싶다.

단테 클럽은 추리 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결국은 시대와 문학에 대한 작가의 소극적인 반론이다. 롱펠로우의 주도로 이루어지던 신곡의 번역이 지닌 시대적 가치와 당시의 사회상을 추리 소설이란 포장으로 감싸고 있다. 겉 표면을 둘러싼 포장지는 작가의 특권으로 재구성된 실존 인물들이 풀어 나가는 살인 사건에 집중되어 있지만 살인 사건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는 상당히 불순하다. 일반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 사조에 뒤떨어진 문학이란 평가를 받던 19세기 미국 문학에 대한 재인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작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싶다.

문학의 변방에 속해 있기에 영문학의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름조차 낯선 홈즈와 로웰은 더 이상 단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이 아니라 풍부한 숨결을 가진 진짜 인간(truth)으로 재창조된다. 서정성으로 이름 높은 롱펠로우는 더 이상 신의 풍부한 선물을 받은 lucky guy가 아니라 애써 상처를 치유하려는 조금 강한 남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지금껏 [별것 아니다]라는 표현으로 폄하했던 그 시대 문학은 진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단테 클럽>이 남긴 것은 호기심과 불순한 의도만이 아니다. 단테의 신곡과 르네상스 이전의 이탈리아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쉽게 작가가 피력한 <시대의 유사성>에 수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내전의 정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피렌체사와 이 내전을 위대한 시로 승화시킨 단테를 통해서 작가는 19세기 중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연다. 단지 관세와 노예 해방이 전부는 아니라고.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맹목적인 광기와 이를 치유하기 위한 믿음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존재하는 법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작가는 실존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사실 머리 아픈 시대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을 음미하지 않아도 단테 클럽은 읽은 만한 충분한 재미가 있다. 롱펠로우가 누군지 몰라도 홈즈와 로웰, 그리고 유명한 출판인인 필즈가 누군지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보다 즐거운 책읽기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재미를 빨아들이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노력을 마치고 나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나와 몇살 차이나지 않는 젊은 작가의 뛰어난 안목에 질투를 느끼게 된다.

2 thoughts on “단테 클럽”

  1. 검색하다가 왔습니다.
    최근에 읽었는데, 역사적 사실들을 나름대로 촘촘하게 엮어 이야기를 만든 작가의 노력과 애정이 느껴져 좋았어요.
    전문 탐정들에 비해 추리력은 다소 딸리지만 인물들 묘사도 매력적이었고요.
    표절, 푸코의 진자, 핑거포스트 1663, 파이 이야기, 이중설계, 다빈치 코드에 대한 감상이 비슷해 더욱 반갑네요.
    (하지만 저는 그 감상을 이렇게 잘 풀지는 못할 거예요.)
    종종 와서 구경하겠습니다.

    1. 추리 소설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면 만족스런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변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꿋꿋하게 의견을 고수한 보람이 느껴지는 걸요.

      사건에 대한 섬세함은 떨어졌지만 인물들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살려 낸작가의 재주에 시기심이 나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럼 자주 찾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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