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고양이>님의 복귀를 바라며

즐겨찾던 블로그가 잠정적 폐쇄 상태에 들어갔다. 지난 반년 동안 매일처럼 나를 즐겁게 만들어 준 유쾌한 장소였는데 부지불식간에 문을 닫았다. 평소 코멘트보다는 포스팅 위주의 글읽기를 해오던 터라 무엇이 이 곳을 잠정적 폐쇄 상태로 몰아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고, 이제는 흔한 일이 되어버린 네트워크 상에서의 공격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련된 포스트와 코멘트가 모두 사라진 지금 나에게는 확인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 (나중에 시간을 내어 읽으려고 마음 먹은 포스트도 꽤나 많았는데…)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인터넷상의 공격은 꽤나 무섭다. 질문의 예리함과 명쾌함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꺽이지 않는 독선이 무섭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냉철한 이지보다 독선이 더욱 쉽고 빠르게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독선은 쉽게 이슈화되고 다양한 경로로 재포장된다. 돌을 던지기도 쉽고(그것도 잘 버려진 돌로만), 보다 비겁하며 은밀한 방법으로 상대의 가슴에 멍울을 만들 묘수들이 더욱 활기차게 생산되는 곳이 네트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끔 주변에서는 <인터넷상에 글을 쓰는 내 행위>에 대해 무용론을 제기하곤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네 글을 읽지 않을 것이고, 네 글을 읽는다 하더라도 그 중 상당수는 끝까지 읽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읽는다 하더라도 삶의 배경이 다른 불친절한 네 글을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겠냐가 무용론의 요지다.

사실 난 이 말에 100%동감한다. 난 독자를 고려하는 친절한 성격도 아닐뿐더러, 내가 아는 것은 남들도 모두 안다는 가정 아래 하루를 산다.(행간에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수많은 사실들을 common sence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블로그 세계에서 나같은 성격의 블로거는 어디까지나 마이너리티에 불과하다. 되려 잠정적 폐쇄에 들어간 이 블로그의 주인장처럼 친절하고 자상한 글쓰기가 몸에 밴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이지를 상실한 독선이 대화란 형태로 이 세계를 구축한다면 블로깅은 점차 재미없는 일이 되어 버릴 것 같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블로깅을 하면서 매일처럼 드나들던 블로그가 악의적인 노림수에 의해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린 것을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한편으로는 충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한적하고 적극적인 방문객이 거의 없다 시피한 현재의 내 상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표리부동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솔직하게 귀찮은 훼방꾼에 의해 고요한 내 놀이터가 어지러지는 것은 딱 질색이다.

[#M_ 개인적으로… | less.. | 개인적으로 난 시에예스의 한 마디를 가슴 속에 새기면서 살아간다. 대혁명 와중에 무엇을 했으냐는 질문에 ‘단지 숨을 쉬었을 따름입니다’하고 대답한 그의 말은 혼란이 있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통용된다. 사람들 대부분은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고 어쩌면 잘못된 결론일지도 모르는 [나만의 결론]을 모두가 인정하는 [진짜 결론]으로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래서 정작 [진짜 옳은 결론]이 내려질 시기에 와서는 완전 연소되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난 내 삶에 기속력을 가지는 결론만큼은 쉽게 쓰지 않는다. 난 여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열린계이며, 진짜 옳은 결론이 내려질 시기가 도래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수긍할 수 있다. 어쩌면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삶에 기속력을 가지는 결론만큼은(다시 말해 제한된 내 삶의 에너지를 수없이 투입해 내린 결론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키고야 만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이기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잡는 세상이라지만 결론을 도출하는 에너지보다 결론을 지키는데 소모하는 에너지가 더 많은 것은 분명 비상식적이다.

사자같은 당통도, 냉정한 원칙주의자인 로베스피에르도, 전쟁의 신인 나폴레옹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납빛의 창백한 푸세만큼은 살아 남았다란 말이 생각난다. 그다지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혁명의 광풍이 멎고 쇼세당탱가의 불기 시작한 낯선 바람을 목격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푸세였다는 사실이 머리 속을 꾸물꾸물 기어다닌다. 진짜 진실은 지금 이순간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우연히 발견된다는 평범한 진리가 아쉽기만 하다._M#]

13 thoughts on “<말하는 고양이>님의 복귀를 바라며”

  1. 적극적인 방문객 여기 있습니다:) 좋은 글이라면 단어와 단어사이의 호흡에서 더 많은 내용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블로그도 그렇고요.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지만 주파수가 맞는 이들의 글은 문장의 톤을 읽을 수 있기에 상관 없지요

  2.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사실 스무살 이후에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의욕을 상실한 것 같아요.
    신이 존재한다면 운명이 존재한다면 나한테 주어진 재능은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재능이 아니라 발견된 것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정도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쉽고 간결한 문장 속에도 깊은 호흡을 담아내곤 하죠.
    하지만 전 호흡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문장이 복잡해지더라구요.
    부드럽게 흘러 나가는 기분이 없어지면서 읽을 수록 답답해 지기도 하고…
    좋은 문장이 무엇인지는 바로 느낄 수 있는데 그렇게 쓸 수 없다는 사실은
    꽤나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더라구요.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한번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우행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호흡으로 말하는 글을 쓸 그런 날도 오겠지요? ^^

  3. 하이얌님의 <말하는 고양이>님의 복귀를 바라며 읽으러 가기

    리더기에 올라온 포스트 가운데 어느 블로그가 일시 폐쇄되었다는 내용을 읽고 혹시나 했습니다.그게 며칠 전이었던 것 같은?

  4. 질문의 예리함과 명쾌함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꺽이지 않는 독선이 무섭다 <- 정말 공감됩니다. 신념이라는 것과 독선이라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독하고 집요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그런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틀렸다는 지적에 대해선, 하나의 의견으로 귀기울일 줄 모른다는 것. 답답하고 화나는 일이죠...

  5. 신념과 독선은 백지 한장 차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현대 독일 지성인들이 히틀러 유겐트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는 독선과 신념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회고하는 경우가 좋은 예겠죠.
    독선을 신념이라 내부화시키는 자기 합리성를 제거할 수 없는 이상
    이런 일은 언제까지나 반복될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사태를 목격할 때마다
    칼뱅에 대항한 카스텔리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츠바이크의 < 폭력에 대한 양심>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인데
    권두에 이런 말이 나오죠.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De Arte Dubitandi-

    수백년의 시간도 인간에게 지혜를 선사하기에는 짧은 시간인가 봅니다.

  6. 며칠전 제 친구가 잘가던 블로그가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고, 그 비판의 포화를 맞게된 글이 누군가에 의해, 역사싸이트에 올라가게 되어 마치 여론 재판을 받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중국사를 전공하던 사람의 블로그였다고 합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흑/백의 논리로 점철되어 판단을 유보하거나 정지한 사람을 회색 분자로 몰아가고 있다고 느껴져요. 특히 학문의 분야에서는 회색적 관점을 견지해야 되고, 어떤 것도 결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결정의 시기는 계속 유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개인적 생각이예요. 그러나 이 사회는 학문까지도 어떤 관점이나 정치적 결정을 갖길 요구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람의 의견, 판단, 관점을 존중해주는 “관용”이 결여되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무조건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 서로를 비방하는 것이 긍정적인 토론 문화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지금 우리가 캄캄한 어둠속에 살고 있나요, 아님 갑작스런 빛에 눈이 멀어버린 걸까요…

  7. 사실 제 전공쪽에서는 학문을 분석의 틀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거든요.
    분석의 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긴 하지만
    분석의 틀 자체는 어디까지나 < 현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서술에 불과하다는 것이 기본적 입장입니다.

    똑같은 현실도 어떤 분석(다시 말해 서술로)으로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될 수 있는 것이겠죠.
    영원한 정답도, 영원한 오답도 없지만
    < 어떤 현실>에 따라 서술의 유용성은 다소간 차이가 난다는 것이
    지난 몇년동안 제가 배워온 것들입니다.
    (결국 학자자 될 생각이 아니라면 상황에 따른 가장 적합한 서술 방법을
    적용시키라고 배우는 것이죠)

    따라서 결론은 임시적인 것이 지나지 않으며
    현실의 부침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제 전공에서 결론이란 현 상황에서의 도출할 수 있는 최적의 것이라는
    성격이 강하거든요.

    하지만 제 전공 같은 실용 학문이 아니라면
    적합성이 아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학문이라면
    이런 수정주의 시각은 지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없는 수정주의가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 학문 세계에 미치는 악영향은
    적게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도록 유혹하는 일부터 흑/백논리까지,
    크게는 학문 자체의 목적을 망각하는 지경까지 몰고 갑니다.
    (학문을 부단히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지. < 결정> 자체는 아닐테니까요)
    관용을 ‘알맹이 없는 절충’으로 평가 절하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구요.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 부적절한 재판>과정에서 느낀 것은
    교묘하게 변형된 수정주의 관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수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것이었는데 발전주의 관점과 다양성 관점
    거기에 쇼비니즘까지 혼란스럽게 섞인 관점을 토대로 판결을 내리더군요.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레와 전차는 강력한 통치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하지만 중남미 문명에서는 바퀴의 사용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라면 분명 수레(혹은 바퀴)의 사용이
    문명의 우열을 나누는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한국에 수레가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논쟁거리가 못됩니다.

    발전주의 관점을 따른다면 보다 보편적으로 사용된 문명이 많은 만큼
    예외성을 어떤 방식으로 간에 설명해야 하구요.
    하지만 발전주의를 인정하면 매도자들은 필연적으로 본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19세기의 사관을 인정해야 하구요.

    하지만 매도자측에서 사용한 논리는
    어느 것도 아니지만 어떤 것도 아니지는 않더군요.
    어느 것도 아니지만 어떤 것도 아닌 것이 바로 수정론의 본질이고
    이런 수정론을 배경으로 태어난 < 독선>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진리 추구 과정에서 나오는 학자적 양심을 독선이라 부르지는 않으니까요)

    사실 저는 카스텔리오의 < 의심을 기술>을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편지의 서명에 사용하는 말이지만 아직까지 읽을 기회가 없더군요
    하지만 저 말의 의미는 항상 마음에 와닿습니다.
    < 빛>은 이데아일 수도, 역사적으로는 종교개혁일 수도,
    혹은 현재의 인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거대한 진리 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 빛>이 존재한다고 < 빛> 자체가 오롯이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겠지요.
    < 빛>을 편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 빛>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도,
    < 빛>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간에 < 빛>을 인식한 후에야 우리는
    과거의 상태가. 그리고 오롯이 < 빛>을 흡수하지 못한 지금의 상태가
    캄캄한 어둠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캄캄한 어둠 속도 맞는 것이고,
    갑작스런 빛에 눈이 먼 상태일 수 있는 것이죠.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 작금의 문제는 근본없는 수정론이 낳은 괘변과 혼란이 눈을 뜨고 빛에 적응해야 할 기회조차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빛은 알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고>
    친구는 경제 관점을 용도에 따라 일관성 없게 정치적 관점에 접목시키는
    행태를 비난한 것이지만 비단 여기에만 한정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8. 수레 이야기를 하시는 걸 보니, 제가 들었던 블로그에 관한 문제였군요. 역사라는 학문 역시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역사는 기술되는 동시에 사실로 간주되는 위험한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이나 역사에는 그 자신의 관점이 있을 뿐 진리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것은 적합성과는 다른 문제이겠죠. 지금 우리나라 교과서의 근대사 부분이 꽤 많이 변했다는 걸 아실겁니다. Truth is out there!!! 씁쓸합니다.

    제가 공부하는 중국미술사에서 16세기 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동기창이란 화가이자 미술사학자의 회화사에 대한 진술과 이론이 “진리”로써 몇백년간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은 전혀 말도 안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오히려 중국회화사 발전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마저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추구하되 결정과 판단은 유보되어야겠죠. 학자적 양심 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 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론이, 토론의 장에서 치열하게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학자적 양심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증거나 이론이 나타났을때, 그리하여 자신의 이론에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도 학자적 양심입니다. 다분히 수정주의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식의 논리 역시 학자적 양심에 위배됩니다. 다른 이론 혹은 대체 이론을 제시해야 논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매도자들은 논쟁을 시작할 자격조차 없는 위인들이지요.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결단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 역시 제가 연구하는 분야에서,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이론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 역시 독선적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듭니다. 깨질때 깨지더라도 제가 추구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올바른 학자의 자세이지만, 그래도 항상 역사를 기술하고 나면, 그것이 곧 진실로 간주되기 떄문에, 판단은 여전히 유보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수례의 사용과 같은 것으로 발전의 잣대를 삼는 것은 논쟁거리도 안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같이 문화상대주의에 관한 책을 읽지 못한 자들, 혹은 산업혁명기의 발전이론을 아직도 신화처럼 믿고 있는 자들이겠지요.

    저 역시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수정주의적 또는 허무주의적 자세에 불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지금 우리나라 사회, 학계가 겪고 있는 정신적, 이념적 공항 상태를 목표로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수정주의의 궤변적 요소가 있지만, 또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합리적인 사고의 단계를 충분히 내면화 시키지 못한 사회가 어떻게 합리주의 이후에 탄생한 수정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지금 수정주의를 악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열린 토론을 가장한 듯, 하지만 단순히 상대의 논리를 흔들기 위해 수정주의가 악용되고 있습니다. 미성숙한 사회에서 수정주의가 악용될 때 역사는 단순히 적합성으로 채택됩니다. 친구분의 말대로 빛은 알지만 적응할 기회가 박탈된 사회가 지금 한국 사회인 것 같습니다.

  9. 재무학에서는 효율적 시장 가설과 랜덤워크 가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효율적 시장 가설을 지지하긴 하지만 이례적으로 랜덤워크 마피아로 의견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98년 채권위기에서 호되게 당한 채권매니저 선배같은 경우였죠. 상승장에서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 유리하지만 하락장에서는 랜덤워크 마피아가 더 적절한 분석의 틀이라는 선배의 말에 얌전히 수긍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내재적 가치는 효율적 시장 가설로 평가하지만 실제 매매 타이밍에 있어서는 랜덤워크 가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이런 의견 수정이 나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것이 제가 배우고 있는 것들이 가르쳐 준 기본 자세였거든요. 지금 이곳은 적합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영역이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것이 아닌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정주의 혹은 개량주의는 전통 맑스이론의 대안으로 출발했습니다. 코민포른도 수정주의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이구요. 하지만 수정주의의 운명은 보다 나은 발전적 대안보다는 기회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는 불운의 길을 걸었던 같습니다.(제가 아는 수정주의자들의 가장 나쁜 예는 1930년대 중국에서 있었습니다) 물론 합리주의의 대안으로 19세기의 수정주의와 다른 성격의 수정주의가 철학에 도입되기도 했습니다만 여전히 수정주의는 그 뜻과 다르게 학문적 기회주의에 악용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문이 추구하는 진리 추구의 연장선상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수정을 < 근본없는 수정주의>라 부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근본없는 수정주의>는 탐구와 성찰이라는 학문의 기본적 입장을 망각하고 시류에 영합하거나 다른 이론보다 강력한 현혹 효과를 갖추기 위해 짜맞추기 이론을 개진하는 것이겠죠.(가끔은 이런 이론은 키메라라고 생각됩니다. 이 이론, 저 이론을 여기저기 짜맞춰 본질조차 모르는 괴물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 탐구라는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수정까지 배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 성찰 없는, 근거 없는, 설명만을 위한 수정주의>를 지양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언급하신 대로 미성숙한 사회에서 기회주의자에 이용당한 수정주의는 적합성을 옹호하는 궤변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질된 수정주의는 본래의 태동과는 상관없이 곡학아세의 주범으로 인식됩니다. 진짜 범인들은 기회주의자이고 이들이 활개 칠 토양을 만들어준 사회의 미성숙 상태이지만 광범위한 수정주의의 악용은 수정주의에 대한 인식마저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저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게 악용되는 수정주의의 구분이 힘들어져 버렸습니다. 아니 눈을 뜬 이후로는 쭉 혼란스러운 상태만 보아왔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무서워하는 독선은 학문적 고집이라 부를만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 근본없는 수정주의>를 바탕으로 태어난 키메라 같은 설명을 토대로 < 이것은 뭐든지 설명할 수 있으니 옳아>, < 난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결코 독선적이지 않아(수정할 준비와 인정은 전혀 다른 단계일테니까요)> 하는 마음으로 하는 진짜 독선이 무서운 것이죠.

    사실 이런 독선에는 약이 없습니다. 학문적 고집은 통찰과 탐구가 언제인가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지만, 이런 독선은 생각을 빈곤하게 만들고 사유의 창조력을 고갈시킵니다. 진짜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들이죠. 그리고 걱정되는 것이구요. 해외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 나라 사람들이 < 답답한 한국>이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의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공간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방관자들이 양산되는 원인이기도 하구요.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공인으로의 적극적인 ㅤㅅㅏㄼ을 살기 보다는 개인의 안녕에 만족하는 길을 선택하려하는 말하지 않는 진짜 이유같습니다.

  10. 그래요.. 그러한 대안을 가장한 독선, 빈곤한 장광설.. 이것이 지금 한국 정치및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지요. 기회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저 역시 침묵하는 방관자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11. 어려서 읽은 정채봉씨의 < 느낌표를 찾아서>에서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사회가 아닌 나 한 사람을 변하게 해달라고 빌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 마음에 와닿은 문장이라서 마음 속에 새겨두고 있었는데
    지금은 되려 그 문장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아직 난 나 하나도 변하게 만들지 못했어. 그러니 다음 단계로 넘아갈 때가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정채봉씨의 아포리즘은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어버린 제 자신을 옹호하는 지침이 되어버렸습니다.
    비겁한 보신주의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목소리를 내기에는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고(무엇보다 자부심이죠) 또 겁이 너무 많아요.

    우려하면서도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은 매한가지인 스스로의 비겁함이 싫지만
    빈약한 신념을 탓하며 오늘도 침묵하는 방관자의 한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저역시

  12. 요즘 읽고 있는 수필집중에..작가가 본인을 가장 위로해 주는 말중에..이런말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다 그래…”
    …물론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논하자는 뜻은 아니지만..누구나 다 그래…라는 말은 참 따뜻한 호흡으로 상대방을 위로해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렇게 위로 하십시오..스스로를 가난한 신념과 방관자라고 칭하지 마시고 공감과 공유속으로 들어오려는 노력..그러면 가슴이 따뜻해 질거에요…
    이미 그 안에 있으신걸요…

  13.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나 다 그래’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말입니다.
    초반에는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지만
    이내 ‘이건 아닌데’를 연발하게 만들지요.

    ‘누구나’란 찜찜한 면죄부를 받는 것보다는
    ‘인정’하고 ‘대안’을 찾는 편이 마음이 더 가볍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게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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