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료 전쟁

환상을 여는 열쇠, 육두구
육두구(Nutmeg)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친구들과의 내기를 통해서 였다. 그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는 6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어를 빨리 찾는 게임이라든지, 삼음절의 단어이면서도 모음을 두 개만 가지고 있는 단어를 찾는 등,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수많은 조건의 조합이 가능한 게임이 유행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떻게 보면 ‘녀석들 굉장한 모범생이네’ 하는 감탄을 터트릴 만한 대목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수업 시간과 자율 학습 시간에 감시자의 눈을 속이면서 할 수 있는 게임 가운데 이만큼 짜릿한 게임은 기호로 두는 체스밖에 없었다. 물론 체스를 두려면 칼을 이용해서 책상에 보드를 조각하는 수고가 선행되어야 했고, 가끔은 포스트잇에 쓰여진 난해한 기호들이 발각되는 경우가 생겼기에 짜릿함은 덜하지만 리스크가 작은 사전 찾기 게임은 꽤나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듯 싶다. (사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수업을 전혀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튼 Nutmeg는 그 당시 내가 찾아낸 제일 멋진 단어였다. 육두구와 정향, 사금과 몰약 같은 단어들은 사춘기 소년들에게 기이한 환각 작용을 일으켰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토파즈 같은 단어가 메머드의 하렘에서 일으켰던 감정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 단어들의 울림을 듣고 있노라면 짜릿함과 거친 바다 사나이들의 모험이 떠올랐다. 선구를 외우고 갤리선과 갈레온의 디자인에 매혹되던 소년기의 환상을 되살리는 마법적 힘이 Nutmeg라는 단어에 담겨져 있던 셈이다.

2002년 겨울, Nathaniel’s Nutmeg(이하 향료 전쟁)를 서점에서 발견했던 최초의 순간에는 시험 기간의 와중에 그것도 3학점짜리 투자론 시험을 앞두고 몰아지경에 빠져 책장을 넘기게 될지 몰랐다. <향료 전쟁>이란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가 세계사의 뒷이야기를 엉성하게 엮어낸 종이 묶음들이 풍기는 느낌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련되고 묵직한 장정을 벗긴 순간 들어난 원제(Nathaniel’s Nutmeg)에 난 이성을 잃어버렸다. 몇 년 동안 의식 속에서 긴 수면을 취하고 있던 소년기의 환상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마젤란>과 가일스 밀턴의 <향료 전쟁>
대항해 시대를 다룬 수많은 책들 가운데 백미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이다. 츠바이크가 그린 마젤란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한 위대한 항해가가 아닌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포르투칼인 선장일 뿐이다.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가 무엇인지 알고, 선상 반란에 대한 불안감도 가지고 있으며, 노련한 만큼 바다에 대한 본능적인 경의를 표할 줄 아는,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욕망에 충실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사실 가일스 밀턴의 <향료 전쟁>에서 츠바이크의 <마젤란>이 담고 있는 문학적 아름다움과 인간 본성에 대한 촌철살인의 경구를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향료 전쟁>을 읽고 있노라면 츠바이크의 문장 위에 밀턴의 문장이 겹친다. 밀턴의 담담하고 평면적인 구술 위에 위대한 작가가 심어준 바다 사나이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겹치면서 마음 속에는 벅찬 감동이 피어 오른다.

그리곤 이내 역사는 그네들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난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겠노라 는 다짐이 마음 속에 움튼다. 사실 이때쯤이면 까페테리아의 편한 쇼파에 앉아 있는 내가 진짜인지 아니면 인도양을 누비는 카락의 선수상에 서 있는 내가 진짜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마음은 활대를 맨발로 걸어다니는 날렵한 뱃사람인데 몸은 시험을 몇시간 앞둔 넋나간 불량 학생이 되기에…

역사가 아닌 연대기
<향료 전쟁>은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다르게 항료 무역의 역사를 다룬 본격적인 전문서는 아니다. 오히려 사가나 크로니클 정도의 단어가 어울릴 법하 그런 종류의 책이다. 육두구로 유명했던 런섬과 그 섬을 지키기 위해 생을 내던진 나다니엘의 삶에 대한 에세이인데 상당한 재미를 자랑한다. 밀턴의 다른 책들에 비해 기승전결도 분명한 편이고 무엇보다 밀턴 특유의 <보여 주기>가 잘 살아 있다.(밀턴의 다른 책들로는 서부 버지니아의 개척 시대를 다룬 책이 한 권, 존 맨도빌을 다룬 책이 한 권, 도쿠가와 막부에서 활동한 월리엄에 대한 이야기가 한 권 더 있다.)

서술은 차분하지만 차분함 속에 표현된 [헌신과 열정]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장이 단번에 넘어가는 이유는 아마 런섬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런섬이 맨하탄과 교환된 구체적인 경위를 몰랐던 호기심이 시험을 앞둔 급박한 현실을 잠재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험 기간이면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무언가를 읽고 싶어하는 욕구’에 굴복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M_ 지난 주말… | less.. |
누님과 장을 보는 와중에 수많은 향신료를 발견하고는 Nutmeg의 뜻을 모르는 누님 앞에서 잘난 척을 조금 했다. 바질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향료의 번역어를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바질은 모르겠다. 바질을 처음 먹어 본 것이 대학 입학 이후였으니 모르는 단어라는 이유로 찾아 볼 턱이 없다. 누님을 졸라 크림 스프를 만들어 먹으면서 후추를 마음껏 뿌렸다. 후추 특유의 쏘는 향과 함께 22살 겨울 para에서 느꼈던 감상이 온전하게 되살아 났다. 한때는 은보다 귀한 가치를 지녔던 것.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무모함으로 지켜졌던 후추는 이제 1파운드당 1달러에도 못미친다.

아무튼 <향료 전쟁>을 보는데 시간을 송두리째 헌납 했음에도 난 국가별 채권 이자율 차이와 옵션을 이용한 차익 거래 모형으로 시험에서 3등을 했다. 하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노력에 비해 잘 나온 시험 성적이 아니라 22살 겨울 <향료 전쟁>을 읽으며 듣던 소니 롤린스의 색스폰 콜로서스와 시나몬을 듬뿍 뿌린 카푸치노다. 22살 겨울을 기억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강렬한 향신료를 맛 볼때마다 난 그 순간, 그 느낌으로 되돌아간다. 22살 겨울은 향신료에 대한 이미지를 되살리고, 강렬한 육두구 정향 계피의 맛은 바다를 추억하게 만들며, 바다는 이루어 질 수 없는 모험을 동경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이 책이 왼손 50센티 반경을 벗어나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대…_M#]

9 thoughts on “향료 전쟁

  1. 저같은 경우에는 서양 배경의 동화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네요.너트멕이라 써있고,그 옆의 괄호 안에 육두구라고 써 있었어요.처음에는 육구두인 줄 알고 무슨 이름이 저런가…싶었는데 육두구더라구요.사실,지금도 헷갈리곤 해요.

  2. 저도 어렸을 적 백과사전에서 ‘육구두’를 찾아 헤맸던 기억이 있어요.
    다른 향료에 비해 성장이 까탈스러운 항료라고 하더군요…
    대항해 시대 이후의 무역을 다룬 책에서도 다른 향료는 플랜테이션이
    활발했는데 금세기 초까지 플렌테이션이 불가능했다고
    언급되어 있을 정도였어요.
    까탈스러움은 비단 ‘육구두’라 기억되는 이름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트랙백 잘 받았습니다. 그분이 언제가는 왕소군과 소군을 다룬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쓰실 것 같았기에 트래백용 포스트까지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3. 모처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군요. 기억이 이런식으로 재편되어 버려서 평하기가 어렵겠지만. 나름대로 몽상속에서 항해와 고난들을 즐겼던것 같네요.

    올블에서가 들어와서 글읽어 보고 있었습니다 🙂

  4. 몽상 속에서 항해와 고난을 즐기셨던 마음이 무엇인지 저 역시 알 것 같습니다. 2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지금도 그 느낌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거든요

  5. 2종이 출간된 것으로 아는데 최근에 나온 하나는 지나친 편집으로 읽기가 거북했던 것 같아요. 전 90년대 중반에 나온 것을 추천해 드리고 싶은데 서점에서는 절판되었는지 좀처럼 발견하기가 어렵네요.

  6. 시간을 넘어 타임머신 같은 글이지만 글이 너무 매력적이라 한 마디 남기고 갑니다. 글을 정말 맛들어지게 쓰시는군요. 저에게 육두구라는 향신료는 기껏해야 ‘대항해시대’ 라는 게임에서 비싸게 팔리는 교역품 그 이상은 아니지만, 과장해서 스크롤을 내릴때마다 향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맛있는 글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오래 전 글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네요.

    1. 저 역시 오랜만에 가이스 밀턴의 책들이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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