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copated (clock)!

새로운 막을 연지도 일년이 지났다. 지난 일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책장의 빈틈없이 매운 일과 도큐멘트 폴더를 더 복잡하게 만든 일. 늦잠을 자지 않는 습관을 기른 것과 좀처럼 놀라지 않는 무던한 신경을 소유하게 된 것 뿐이다.

사실 두해 전 10월에만 해도 조금 돌아갈 여유가 있다고 자신 만만 했었는데 어느새 스물 다섯이 코 앞으로 다가섰다. 어린 시절, 꺾인 20대가 되어 간다고 누님들을 놀리기 시작한 무렵이 바로 이 즈음인데 나도 벌써 그 나이가 되어버렸다. 결혼한 친구도, 직장을 가진 친구도, 신에게 인생을 봉헌한 친구도 있는 그런 나이가…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만으로 나이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25살이라 하지 않고, 23살 몇 개월 혹은 스물 넷이라 나이를 밝히는 교묘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간다. 난 어떤 거짓말쟁이가 될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WC군과 벤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는데 문득 우리가 교정의 벤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긴 것이 3년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22살에는 크리스마스 무렵에 휴가를 몰아 나오기 위해 WC군이 가을 휴가를 아껴 두었고, 지난 가을에는 우리 둘다 서울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화창한 가을날 벤치에 구겨져 있던 두 남자를 본 행인은 이런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벤치에 두 남자가 앉아 있다. 두런 두런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까지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두 남자의 모습은 흡사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같다. 잠시 저 남자들이 지금 어떤 퍼포먼스 중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해 본다. 목이 좋은 저 벤치에서(목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눈에 띄기도 싶다는 의미다) 저렇게 두 남자가 붙박이 가구처럼 앉아 있을 이유를 설명하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별난 것들.

벤치에 앉아 WC군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녀석이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일 때면 늘 하는 이야기가 또 다시 흘러 나왔다.

이런 날에 여기 있으면 난 그 누나가 생각나.
불어랩 같이 듣던 그 누나 말이야?
응. 중도관 벤치에서 길고 섬세한 손가락 사이에 하얀 담배를 끼워 넣고 연기를 내뱉던 그 장면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사실 녀석이 진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는다. ‘누나’란 단어는 단지 기억을 여는 실마리일 뿐, 진짜 녀석의 마음을 사로잡은 기억은 ‘누나’란 단어와 어떤 연관관계도 없다. 이내 두 남자 모두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빛에 취해 빠른 걸음으로 각자의 과거를 걷고 있다. 가끔은 교차점에서 마주치기도 하면서, 때로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면서…

가을 햇살에는 오래 전 기억을 되살리게 만드는 묘한 힘이 숨겨져 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잊은듯 냉정하게 굴지만 가을 햇살에 노출된 마음은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카메라 들어 경영관에서 중도관으로 올라가는 커브 계단과 L-P관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찍었다. 그리고 잠시 종이 접기 놀이를 했다. 하지만 시선은 미술학부에 한켠에 전시되어 있는 금속 주물에 집중되어 있다. 혹여 ‘고도’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금속 주물를 바라본다.

그리곤 이내 스물 다섯까지 80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현실을 기억해 내곤 끔찍해 한다. 끔찍함에 피곤해져 <유태인 회랑>을 보러 가기로 마음 먹었던 계획을 잊었다.

[#M_ Ex WC |Exo tes thyras ouden(저 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네. 한가함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머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 신체의 밸런스가 깨져 열에 시달리고 있긴 하지만 어제보다는 나은 상황이야. 어제는 내가 입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에 없거든. 그러다 갑자기 일년 전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네. 오전에는 초콜릿 머핀을 만드는 과정을 보고 있었고 오후에는 상념에 잠겨 창 밖을 바라보며 까페 베로나를 마시고 있었을 거야.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네. 이제와 생각하면 그 당시 내가 했던 거의 모든 생각들이 현실이 되었군.아무튼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는 이제 막간극(2003.7월 19일부터~10.19까지)은 끝났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지. 앞으로는 새로운 막이 시작될 거라고 이 막에서는 착한 인물보다는 이기적인 인물 배역을 맡아보기로 마음 먹었네. 축제도 끝냈고, 뒷마무리도 지었으니 이제는 축제가 주는 환희를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겠다는 생각도 했네. 꽤나 마음 아픈 일이었지. 그렇게 일년이 지났어.

스물 넷 시월. 솔직히 더 이상 환상이 없네. 환상보다는 그냥 묵묵히 무언가를 하는 쪽이 더 편해졌어. 쉰 이상은 잉여인생 이랬으니 내년에는 반기 목표를 달성해야겠다고 내심 생각중이야. 지금 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지금 우리가 디디고 있는 여기가 평생동안 살 터전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늘 말하는 것이지만 지금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의지의 주인일 수는 있겠지만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할 것들이 우선인 삶이잖아. 어느 누구의 기대에도 실망이란 단어를 선물하고 싶지 않아. 때로는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해보지도 않고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 강하지 않다면 강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고 부족하면 채워넣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쉰 다섯에는 반드시 은퇴해서 리스본에 멋진 빌라를 사서 책과 함께 은둔할 예정이야. 진짜 독서가가 되어 문장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나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떨려와. 여름에는 비스케이만에서 낚시를 할테고, 봄이면 프로방스의 풀냄새 나는 길을 산책 할테야. 내 진짜 인생은 그 이후에나 시작될 거라고. 그 전의 몇 십년은 기대의 노예가 되어서 살리라 마음 먹었지. 하지만 이 긴 예속 상황이 싫은 것은 아냐. 인내한 만큼 보상이 있고, 무엇보다 기대를 채워나가면서 우리 역시 행복과 만족감을 느낄 테니까. 그리고 어차피 기대에 예속될 운명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래야 진짜 인생이 시작되었을 때 배는 기쁘지 않을까?

고민은 하루 10분이면 충분해. 고민이 가져다 주는 것은 더 큰 고민이고, 자신감의 상실이며, 자괴감으로 이어지는 파괴적 성향에 촉매일 뿐이야. 그러니 지금 주어진 상황을 유연하게 즐기라고. 지금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진짜 인생을 살 기회조차 박탈당할 수 있으니 말이야.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하고, 이것을 왜 하느냐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어차피 우리에게 길은 하나내지 두 개니까. 그편이 더 마음 편하고 행복한 것 같아. 내가 축제의 환희에 빠져 꽤나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주면 고맙겠고… 너만큼은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뿐만 아니라 녀석도 그렇게 생각한다에 <귀홍>을 걸 용의가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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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Syncopated (clock)!

  1. 헤아려보니 자네와 한학기 밖에 차이가 안 나는 군. 참, 고맙네.
    한쪽으로 듣고 흘려버렸지만 이렇게까지 해주니 부끄럽기만 하네.
    셔츠를 머리에 감고 공부하는 녀석 그리고 모처럼 파라의 커피가 아닌
    것으로 내기를 청한 널 생각하면 이제야 말로 분발해야겠지.

    혹시 이번 주말에 만나게 된다면 짧은 머리를 볼 수 있을테야.
    어쩌면 20살에나 하고 다닐 법한 것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도 있겠지.
    스스로를 움직일 수 없는 위치까지 몰아놓고서야 비로소 무언가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못난 내 모습을 그냥 이해해 주게나.

  2. 한학기라니. 한학기 반이나 차이 난다고.
    그리고 내기가 아니라 일종의 과장법이었다고.
    설마 그 비싼 < 귀홍>을 내기로 걸 만큼 경제 관념이 엉망이겠니?
    (난 전형적인 위험회피자…)

    아무튼 힘내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넌 내 과오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나저나 시험 잘 보시게. 주말에 집에서 푹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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