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씨의 이상한 소설

이제야 다빈치 코드를 읽었어. 작가에 대한 무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지금껏 읽었던 수많은 소설들의 플롯과 캐릭더들이 머리속을 떠돌아 다니더라. 자료 조사야 제대로 했겠지만 댄 브라운은 오히려 앤 라이스보다 못한 것 같아. 본인이야 앤 라이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글을 쓸 때 어떤 소설의 캐릭터에 의존했는지 눈앞에 선하더라고. 그 정도로 캐릭터를 빌려올 셈이면 위대한 작가들에게 경의 정도는 표해야 정상일텐데 그것 마저 없었어. 단언하건데 올해 읽은 최악의 책이야.

어렸을 때 4차원의 세계라는 기호학과 점성술, 미신의 마스터 피스를 통독한 나로서는 차라리 에코나 반덴베르크의 소설이 휠씬 더 재밌게 느껴지는 것 같아. 반덴베르크의 소설에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에코의 소설에는 위트와 독설이 흘러넘치니까. 이런 소설에 비하자면 브라운의 소설은 뭐랄까? 십대 소년의 모작같다고 해야할까? 얼마 전 블로그에서 <또 하나의 표절>이란 포스트를 읽었는데 다빈치 코드를 읽고 나니까 이제야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감이 잡히고 있어.

창작은 창작이되 상상력이 아닌 기억력이 낳은 문장은 분명한 표절이겠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변용되던 간에 말이야. <사랑해야 한다>와 <사랑의 의무>가 두 개의 이름을 가진 한 작품인 것처럼. 어쩌면 브라운도 파브리처럼 서재에 분명 놓여 있을 뒤마의 책을 읽고 끔찍한 운명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십대 소년의 습작에는 죄를 물을 수 없는 법이지만 십대 소년의 습작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면 책임은 져야 겠지?

세상에 순수한 창작은 없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정도의 문제는 존재한다고 생각해. 어떤 경우이던 소재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법만큼은 독창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풀어내는 방법을 답습하려면 흔하지 않은 소재를 사용하던가. 흔한 소재에 대가들이 창조해 낸 캐릭터를 덥입힌 소설 마저 작품으로 인정해줘야 하는 것일까?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다빈치 코드>를 읽고 싶다던 이에게 한 질 선물할까 했는데 이제는 뭘할지 되려 고민이야. 무엇이 되었든 이것 보다는 낫겠지만…

Modified 2004.10.28 치명적인 오타 발견. 당황. 면목 없다. 몹시 졸린 정신으로 쓰긴 했지만 이런 대형 사고를 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나 웃겼을까? 고얀 녀석들 살짝 귀뜸이나 해주지. 월요일날 술마셨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Modified 2004.11.11 사실 브라운씨의 소설이 싫었던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가끔 난 나의 아이덴티티를 숨기고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을 때 Paganus란 닉네임 뒤에 숨는다. Paganus란 아이디 뒤에서 난 가끔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자체 설정을 사용한다.(그렇다고 무례한 정도는 아니고 아주 가끔 거짓말을 한다. 가령 30대 중반의 나이든 사람의 문체를 사용하거나 특정 단어를 사용하며 분위기를 유도한다. 진짜 거짓말은 아지만 그렇게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거짓말일테지)

하지만 댄 브라운은 소설 서두에게 Paganus의 어원을 분해함으로써 내가 지키고 싶던 비밀을 온세상에 공개했다. 원래는 시골 사람이라는 뜻. 기독교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본래의 신앙을 지키던 사람이라는 뜻을 공개해버린 것이다.

라틴어 사전에 나오는 Paganus는 배교자란 뜻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박탈당한 권리에 대한 증오가 서려 있다. 지배적 패러다임에 대해 늘 순종적인 내가 가끔 그것을 부정해 버리고 싶을 때 난 이익과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움직이기 위해 Paganus뒤로 숨는다.

8 thoughts on “브라운씨의 이상한 소설”

  1. 그래도 넌 대단하군
    다 읽었다니…
    난 아직도 하편을 한달째 쳐다만 보고 있다..
    오기로 읽어야지 하는데…
    어렵네…

  2. 난 깔끔하게 4시간 투자했지.
    그런데 차라리 그 4시간에 딴 일을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후회하고 있어.

    그냥 시간 죽인다 생각하고, 눈 딱 감고 읽어버려.
    누나의 화려한 추리 소설 경력을 생각하면
    (난 아직도 겨울 방학 내내 추리소설만 읽어대던 누나가 떠올라)
    이미 범인은 알고 있겠지만…

  3. 야 너 왜 갑자기 구어체냐? 심히 어색하고 읽는 이를 더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큰언니 추리소설 읽는 것 때문에 난 정말 책 읽는게 나쁜 짓인줄 알았어.
    돌이켜보니 우리 4남매는 늘 몰래 몰래 책을 봤던 것 같다. 아.. 넌 아닌가?

  4. 숨어서 책 읽는 집은 우리 밖에 없을 거야.
    난 어렸을 때 다 읽은 것인지도 모르고
    커서 또 다시 읽으면서 내가 추리의 대가인줄 알았다고

    아무튼 어투는 청자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쓴 것이라서 그래.
    그 청자가 궁금하면 거실 책장 맨 오른쪽 아랫단에 있는
    분홍색 책표지를 읽어보도록. 거기에 이름이 나오니까 말이야.

  5. 랭던 교수는 마치 영화 속에서 뛰어나온 인물, 또는 앞으로 영화 속에서 만날 주인공으로 느껴지지 않았나요? 브라운씨가 소설에서 랭던 교수를 묘사할 때, 해리슨 포드를 언급했던 것은 이 소설의 궁극적 목표는 헐리우드 영화라고 고백하는 듯 했어요. 사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었요. 마지막 장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의 글발에 감동했죠.

    그리고 나선 사기당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마치 Usual Suspect에서 주인공 남자가 벽 위에 붙은 신문지, 쪽지 등을 읽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알리바이인 듯 이야기 하듯이, 브라운 씨는 데자부 현상과 혼동스럴 정도로 친근한 소재와 인물 캐릭터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어요.

    치밀한 상업적 계산 속에서 글을 썼다는 것, 베스트 셀러를 영화화하는 미국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모범답안으로 썼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합니다. 마치 500 짜리 맥도날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나면, 방금 달콤함을 주던 우유향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개운치 않고 질리는 느낌을 줍니다.

    소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을 이루는 요소들은 모두 최근의 문화를 지배하는 문화 코드인 에코 훼미니즘, 음모론, 기호학 입니다. 매우 영악하지 않나요? 지적인 듯 하지만, 매우 얄팍한..

    움베르토 에코가 방대한 지적 편력을 바탕으로 쓴 소설의 설계 도면을 빌려, 브라운씨는 헐리우드에서 통하는, 미국의 교양인들이 잘 알고 있는 문화코드를 건축 자재로 사용하여 조립식 건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즉 다빈치코드는 예술적 창작물이라기 보다는, 기성품을 이용한 조립식 조합물이죠. 문제는 너무 편하게 잘 만들어 읽는 사람들에게 큰 문제점을 제기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거죠. 마치 우리가 몰개성적인 아파트에 사는 것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 처럼요…

  6. 다빈치 코드를 읽으면서 느낀 불편함의 정체는 아무래도 그 익숙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는 와중에도 이 것이 과연 처음 읽는 책일까 하고 계속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불편함. 이제는 익숙해질 때로 익숙해져 디테일한 묘사가 없음에도 머리 속에 그려지는 상황.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영화의 한 장면 일 뿐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소설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차용이 이루어진 소설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기사가 범인이라는 사실 역시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뒤마가 보여준 일인 다역의 인물 속에서 스승의 존재를 눈치 채기란 쉬운 일이니까요.

    알비노 수사에게 전화를 건 스승이 쐐기돌을 찾았다는 언급을 하는 와중에 스승으로 지목될 사람은 네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쐐기돌의 존재를 몰랐고, 또 한 사람은 쐐기돌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또 한 사람은 베르투치오에 불과한 단역이었죠.

    사실 처음부터 기성품으로 쌓은 조립식 건물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문화 코드 역시 있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예정이었구요. 하지만 건축 공법 만큼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동일한 문화 코드라도 그것을 쌓는 방식에 따라서는 전혀 의외의 것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브라운씨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진짜 자신의 소설을 쓰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습작이라면 모르되 전업 작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물의 동기와 행동 변화를 설명해 줄 개연성이 부족한 것도 결정적인 약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일류 각본가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도 부연합니다. 회상이 많은 만큼 전체 이야기에 짜임새를 유지하면서 영화로 만들기란 보통 험난한 작업이 아닐 테니까요. 사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함이고, 또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브라운씨의 소설은 제게 이 두 가지 모두 주지 못했어요.(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감상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아무리 후한 평가를 내리려고 노력해도 이 책이 어떤 이유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아요. 접근성이 높기 때문일까요? 이야기는 꿈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꿈 속에서 상상할 정도의 이야기라면 이미 수많은 자극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쾌감을 선사하기에는 부족한 것 일 테니까요.

  7. 푸코를 좋아하는 저한테는 정말.. 반갑지 않은 소실이었답니다.
    추리/스릴러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덜렁 샀었는데..

  8. 예…
    이 포스트에서 대형사고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방금에야 발견했어요.
    정말 면목이 없네요.

    저도 <푸코의 추> 좋아해요.
    해마다 장정이 입혀지지 않은 전개판 이전의 검정색 표지로 된 책을 빌려서
    브라질 다녀온 이후의 이야기만 한번씩 읽곤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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