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하인리히 만과 <앙리 4세의 청춘>
혹여 기회가 된다면 꼭 배우고 싶은 언어가 있다. 조금 엉뚱하지만 그 언어는 독어다. 사실 독어는 내가 살아 갈 세계에서는 변방의 언어쯤으로 취급 받는다. 효용이 높지 않은 언어라고 할까? 먼 훗날 엔리케의 탑이 보이는 맨션을 살 여유가 되지 않는다면 차선으로 생각해 놓은 노년의 일상은 츠바이크와 하인리히 만의 저작을 원어로 읽는 것이다. 그 만큼 난 그들을 사랑한다.

샨사의 <측천무후>를 읽으면서 난 하인리히 만의 <앙리 4세의 청춘>을 생각했다. 사실 두 책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시점은 다르지만 읽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분위기만큼은 매우 똑같다. 측천무후의 어린 시절을 그린 샨사의 표현을 음미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앙리 4세가 뛰놀던 피레네의 거친 산등성이를 생각했다. 액정에서의 부자연스런 생활을 읽으면서 앙리 드 나바르의 연금 생활이 생각했고. 무후의 어머니 양씨 부인에게서 나바르의 잔느(위그노의 여왕, 포의 잔느)의 환영을 보았으며, 치노에게서 마르고(마고 드 발루아)를 느꼈다.(잔느하고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 로트링겐의 마리의 이름을 헷갈렸다)

어쩌면 이런 유사성은 감상자의 편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샨사가 <앙리 4세의 청춘>을 읽었으리라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재미가 단지 문자를 해석하는 행위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테니까 나에게도 샨사가 하인리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내 멋대로 생각할 감상권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사실 <측천무후>를 재미있게 읽은 이유는 바로 이런 유사성에 있었다. 어린 시절 난 로트링겐의 이야기를 하인리리의 방식을 빌려 풀어내려는 시도를 한적이 있었다. 물론 이 시도는 아직까지도 잠정적 중단 상태에 놓여있긴 하지만 때가 되면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샨사의 <측천무후>는 이런 나의 시도를 가장 멋진 형태로 실현시키고 있었다. (물론 소살의 중반부까지 만이다…)

작가와 사랑에 빠지다-샨사
저자 소개에 실린 사진을 보면서 난 처음으로 여류 소설가에게 작가 이상의 관심을 가진 듯 싶다. 30대의 여성. 사랑을 관조하기 시작하는 나이. 문장뿐만 아니라 말에도 능숙한 표현력이 있고, 순수와 농염함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진짜 여자. 만약 이런 사람을 서른이 넘어서 만났다면 강렬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리라는 헛된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그런 표정.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찾아 헤맨 것이 무후인지 샨사인지 명확하게 구분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난 무후를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샨사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치고는 비정상적인 것임이 틀림없지만 문장에 남아 있는 그녀의 독특한 체취를 발견하는 것은 진정 즐거운 일이었다.

샨사의 문장은 일견 건조하다. 시적인 글이란 평가를 받는 문장이지만 문장의 외피는 건조하다.(이 건조성은 작가와 인물을 분리하려는 시도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강한 정열을 가진 사람들이 딱딱한 껍질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처럼 샨사가 지닌 문장의 맛은 건조함을 가장한 외피를 벗겼을 때에야 그 진가가 들어 난다.

아니 샨사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긴장과 공포가 있다. 긴장과 공포는 이내 독자를 모호한 쾌락으로 몰고 간다. 처음에는 담담한 표현이 흐르는 얕은 여울에 발을 담근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지만 이내 끈적끈적하게 신경을 빨아들인다. 얕은 여울은 어느새 깊은 강이 되어버리고 문장의 흐름에 시간을 지각하는 능력을 놓는다.

하지만 샨사는 아직 젊은 작가다. <측천무후>의 후반부에서 샨사는 노년의 심리를 매끄럽게 표현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무후가 늙어갈수록 흔들림 없이 흐르던 문장은 점점 모호해지고 불분명해진다. 아니 명료성을 잃고 방황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스스로 느끼는 무후란 여인과 정치적 실체 사이에서 균형추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무후가 느끼는 권태의 외형과 본질을 포착하려 노력하지만 되려 권태에 빠진 것은 샨사의 소설이었다. 하지만 되려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확신으로 다가왔다. 소설에 맺힌 상이 스스로를 투영하는 것이라는 예상을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숨길 수 없는 증거였다. 사람들이 <측천무후>에 대해 물었을 때 난 읽지 말라는 대답으로 질문을 일축한다. 작가에 사랑에 빠지는 이런 기분은 아무리 친한 친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는 혼자만의 기쁨이기에…

<무위의 화>에 대한 반론
<측천무후>는 한 여자의 심리 소설로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다. 하지만 <정치적 실체>를 다룬 소설로는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정치적 과정에서 황제 武照가 느꼈을 갈등과 이유에 대해서는 넌지시 말하기로 상황을 모면한다. 본격적인 심리 소설을 표방하는 츠바이크와 비교하자면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고, 인물을 가닥가닥 해체해 원형조차 찾아볼 수 없게 만든 역사 서술에 바하면 생동감이 넘친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딱 중간에 위치한 포지셔닝이랄까?

하지만 이 정도 포지셔닝도 샨사가 의도했던 왜곡된 무후에 대한 반론으로는 충분하다. 샨사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소설 속 주인공이 기존의 역사와는 다르게 독자의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무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기존의 왜곡된 사실로 무후를 비난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느껴질 만큼 샨사가 그린 무후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알몸의 임금님이었다.

사실 무위의 화라는 기존의 역사적 평가는 소설을 즐기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샨사가 펜을 놀려 보여주고, 독자가 공감해주기 바라는 것은 당고종의 황후이자 주를 세웠던 측천무후가 아니라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종속당한 본질적 한계를 거부하고 투쟁했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쉽게도 <측천무후>는 좋은 소설은 아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타인의 언어로 글을 쓰는 외국인 작가가 필연적으로 걷게 되는 숙명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녀가 무후처럼 본질적 한계를 거부하고 투쟁하기를 바라지만 아직 그녀는 작가 샨사가 아니라 불어로 소설을 쓰는 <중국인 작가 샨사>다. 그녀가 중국에 관해서, 중국 여자에 관해서, 중국 여자의 사랑에 관해서 보여주려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한 인간의 사랑과 운명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다. 사실 난 그런 소설을 기대한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중국인 작가 샨사>가 아니라 <작가 샨사>이므로

6 thoughts on “측천무후”

  1. 멋지네요^^책도 멋질 것 같고,책에 대한 하이얌님의 묘사도 멋지구요.(어제 자느라고 엠에센으로 말 거신 걸 미쳐 몰랐어요;죄송합니다ㅠㅠ)

  2.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권하기는 어려운 책이예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 다양한 느낌이 나올 수 있는 소설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감상법은 소설 속에서 작가를 찾아보자는 것이었어요. 조만간 포스팅하겠지만 친구와 대화를 나눈 이후에 책장의 가중치에 변화가 생겼거든요.

    사실은 그 친구에게 ‘새들은 페루로 가다’를 좋아하면서 왜 로맹 가리에게 애정을 느끼지는 못하는지 시비 좀 걸어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글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샨사를 토대로 체크를 부른 셈이죠^^

  3. 측천무후를 사서 읽는다고 하셨을 때, 옆집에 사는 친구였다면 그냥 내가 빌려줄테니 읽으라고 말했을 거예요..

    적극적으로 빌려줄 수 있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옆집에 사시지도 않고, 더욱이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어요.

    저 역시 照가 보낸 어린 시절의 수난, 궁궐에서 보낸 시절을 다룬 부분을 특히 즐겁게 읽었어요. 어렸을 때 키다리 아저씨, 소공녀, 빨강머리 앤 처럼, 어려운 시절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좋아했던 당찬 소녀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여왕 마고를 떠올리신 것은.. 정말 놀라워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영화를 좋아해서 다섯 번쯤 보았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떠올리지는 못했거든요..

    아쉬운 점이라면, 프랑스의 중국 작가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는 것이지요. 이 소설의 매력적인 요소였으나, 동시에 아쉬운 점이었죠. 세밀하고 정교한 묘사는 여느 동양 소설이 지닌 것 보다 밀도가 있었으나, 너무나 섬세한 묘사력은 소설에 이유없는 나열로 보이기 일쑤였고, 어느 정도의 가벼움마저 주었어요…

    특히 번역자는 지나칠 정도로, 서양의 언어로 중국 문화를 번역했다고 생각해요. 중국 문화의 신비함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들을 사용했더라면, 소설이 지닌 묘사의 매력과 조화를 이루는 무게감을 주었을 것 같아요. 복식과 건축물의 묘사에 있어서 사용된 서양식 언어는 참 거슬렸어요..

    불어로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소설이예요. 고등학교때 배운 프랑스어를 너무 쉽게 포기한 걸 후회했어요. 원어로 읽었더라며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최대의 미덕이 아름다운 묘사에 더욱 감동했을 것 같아요…

  4. 측천무후는 정말 권하기 조심스런 책인 것 같아요. 뭐랄까? 매력이 분명하게 존재하긴 하는데 그 매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거든요. 그러면서도 단점도 분명하게 드러나구요.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이런 책을 권하는 것은 다모클레스의 검이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것 마냥 위험한 일이죠.

    하지만 전반부는 정말 재미었던 것 같아요. 읽으면서 전혀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면 거짓말일테지만 그것을 상쇄하고 남을 매력이 담겨져 있었거든요. 번역에 대해서는 저 역시 불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악한 불어 실력(친구들 사이에서 제 외국어 실력은 꽤나 악명이 높답니다)으로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색채와 형태가 마음에 썩 와닿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껏 읽고 본 다양한 것들이 그 틈을 매워준 것 같아요. 확신은 없지만 기억을 토대로 그려지는 이미지라는 것이 있잖아요? 어쨌든 동양문화권에서 중국은 마냥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표정을 지닌 이웃일테니까요.(사실은 어려서 본 측천무후라는 중국역사물-무협물이 맞겠지요-이 계속 그려지는 바람에 상상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저역시 소공녀와 키다리 아저씨, 앤 시리즈(5권 밖에 못 읽었어요)를 같은 이유에서 좋아한 것 같습니다. 여왕 마고 역시 5번은 넘게 본 것 같구요. 처음에는 이자벨 아자니의 매력에 반해 보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라 몰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구교측의 백작과의 교감에 반했어요.(아! 어감은 기억나는데) 그들이 함정에 빠질 때, 샤를의 독살 혐의로 사형당했 때 보여주었던 그 감정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거든요. 성 바르톨로메오 사건에 대한 호기심은 그 시대 역사로 저를 안내한 호기심의 근원인 셈이였죠.

  5. 샨사가 의도했던 건 애당초 측천무후에 대한 복권이나 사회적 접근, 내지 측천무후라는 인물의 독특함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측천무후가 지닌 여성으로서의 보편성에 주목하였고, 측천무후 개인이라기보다는 여성 일반의 성장과 욕구, 환상에 대해 차분히 그려낸 듯해요.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서구적인 시점과 묘사는 ‘중국’이 아니라 중국 안에 자리잡은 ‘보편제국’을 위한 것이었고 말이에요.

  6. 한 단어를 표상할 때는 머리 속에서 여러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측천무후의 경우 여자와 권력자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겠지요. 보통의 독자라면 측천무후란 단어를 통해 그 어떤 것보다 여황을 생각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죠.

    만약 측천무후의 제목이 그녀의 이름인 무조였더라면 다시 말해 imperatrice가 아니었더라면 저 역시 권력자 무후의 이미지를 지운 채 편안한 마음으로 산샤의 문장에 빠져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작가는 제목을 통해서 독서의 지침을 내려주었던 듯 싶습니다. 여자 측천무후 역시 해석의 축이겠지만 여황제라는 제목으로의 접근을 통한 해석 역시 버리기에는 꺼림직했답니다.

    게다가 코스모폴리탄이 아닌 보통의 독자에게 ‘보편제국’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보편제국’이 역사적 맥락의 ‘보편제국’인지 보편성을 강조하는 ‘보편제국’인지 개념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적인 제국으로소서의 당과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든지 억압받는 존재였던 여성이 속한 사회 가운데 어느 것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일지도 모르겠구요.

    하지만 독서는 작가와 독자의 일신전속적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산샤의 만남이 있고, 쁘뉴마님과 샨샤의 만남이 있겠지요.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과 회상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요. 한 권의 책으로도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정답이 하나인 유리수의 방정식이 아닐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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